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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소년 Apr 15. 2024

11. 크리스마스트리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창비)     

 



 리스트레토, 에스프레소, 룽고. 추출 시간에 따른 에스프레소 종류다. 메뉴에 에스프레소를 종류별로 적어놓은 카페는 많지 않다. 다행히 회사 근처 카페에는 세 종류의 에스프레소를 취급한다. 에스프레소에 비해 추출 시간이 짧은 리스트레토는 맛이 진하다. 룽고는 추출 시간이 길어 쓴맛이 더 강하다. 한때 룽고만 마셨다. 에스프레소보다 양이 조금 더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경제성을 따졌다. 진정한 커피마니아는 아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룽고를 주문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꺼내 표지를 본다.     


 

 물었다. 표지를 보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드는지. 크리스마스카드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표지를 봤다. 짙은 초록 바탕에 빨강이 눈에 확 들어온다. 확실히 크리스마스 분위기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카드보단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3단으로 된. 초록은 전나무를, 빨강은 전나무에 걸린 작은 구를 연상시켰다.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가 크리스마스 이브 밤 중에 숲속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평소 어둡던 숲이 등불을 켜놓은 듯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롱한 달빛이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전나무 위에 비치고, 주변을 환하게 비춰서 빛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마르틴 루터는 순간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은 저 전나무와도 같다. 한 개인은 어둠 속의 초라한 나무와도 같지만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주변에 아름다운 빛을 비출 수 있는 존재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나무 하나를 집으로 가져왔고, 눈 모양의 솜과 빛을 발하는 리본과 촛불을 장식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시작이라 한다. (위키백과 참조)


 크리스마스트리의 기원에 관한 글이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예수 탄생을 경배하는 크리스마스의 상징이다. 소설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의 이야기이다. 예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와 인간의 죽음을 기리는 장례식, 탄생과 죽음을 잇기에는 먼 이야기 같다.      

 

 화자인 그녀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구례로 내려왔다. 장례식에 조문 온 이들은 아버지를 추억했다. 추억은 각자의 사정이라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되새겼다. 각자의 회상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매번 다르게 나타났다. 그녀가 생각한 아버지와 너무 달랐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p248~249     


 인상 깊은 조문객은 아버지의 담배 친구인 노란 머리의 오거리슈퍼 손녀였다. 소녀는 베트남 출신의 엄마와 술주정뱅이 아빠를 배경으로, 많은 불우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 피우는 소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소녀를 편견 없이, 어린애가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소녀와 담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대하는. 때론 이것이 어떤 이에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방식과 위로에서 사람 냄새를 진하게 맡았기 때문에 인상 깊었는지 모른다.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한 친구를 생각한다. 그로 인해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어느 날부터는 그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다. 당시 나는 아메리카노 블랙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에스프레소는 아예 생각에도 없었다. 에스프레소는 너무 써, 사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마시고 있었다. 멋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했다. 어느 누가 자신이 못한 것을 할 때, 그를 부러워하는 십 대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도 마시고 있었다.      

 

 조문 온 이들은 아버지를 추억했다. 각자의 추억이라는 조각들이 장례식장에서 한데 모여 아버지의 민얼굴을 그려냈다. 교련 선생으로 퇴직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했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존중한 아버지의 소학교 동창 박한우 선생, 아버지의 아들 같은 역할을 해온 윤학수, 장례식장 황 사장, 실비집 여주인, 정치적 동지인 박동식, 월남전 참전용사로 다리 하나를 잃은 노인, 빨치산 동료들, 아버지가 살려준 전직 경찰인 김상욱, 아버지의 담배 친구 노란 머리 소녀, 아버지의 빨치산 활동으로 피해를 보고 원망에 사무친 큰아버지의 아들 고상수와 작은아버지, 아버지 첫 번째 부인의 처제, 어머니 전남편 가족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삶과 연을 맺어, 그들의 입으로 그려지는 아버지의 그림 조각들은 영정 앞에서 하나하나 모여 입체적인 아버지로 태어났다. 그녀에게 고지식한 유물론자였던 아버지는,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새로운 사람이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p231          


 이 지점에서 크리스마스와 장례식, 탄생과 죽음은 이어질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는 날이고, 장례일은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다. 축하는 날이기에 분위기는 들떠있고, 애도하기에 분위기는 무겁다. 그러나 소설의 장례식은 무겁지 않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 곪았던 사정이 장례식에서 애도로 풀어졌다. 그 과정은 때론 서글프고, 때론 안타깝고, 때론 유쾌하고, 때론 유머러스하다. 이 속에서 화해와 용서가 오가고 장례는 따뜻하고 포근해진다. 이리하여 아버지인 고상욱의 장례는 화해, 용서 그리고 감사가 스며있는 크리스마스에 닿는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빨치산 출신의 고지식한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 냄새 풀풀 날리는 참사람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룽고를 마셔서 그런가? 쓴맛이 확 올라온다. 어느 날 그는 캐나다로 떠났다. 한동안 룽고만 마셨다. 그를 생각하며. 그래서 에스프레소는 나에게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나면 전용 잔인 타미타세엔 무언가 그려져 있다. 그려진 금빛 은하수 같은 크레마에서 그리움을 본다.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도 어느 것에 남아 문득문득 그것을 깨울 것이다.     

 

 표지를 다시 본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신구 같은 자전거, 깃발, 집들이 눈에 띈다. 여기서 운동감을 주는 것은 자전거다. 운동감으로 자전거의 궤적은 트리를 두르는 전선과 전구를 연상시킨다. 또는 아버지가 지나온 이념 궤적이 아닐까? 도 생각해 본다.      

 

 이데올로기를 깃발로, 집을 체제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상단은 자전거를 탄 아버지인 고상욱이 빨간 집을 지나기 전이다. 그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지니기 전의 시기이다. 중간은 커다란 빨간 깃발이 살구색 집에 꽂혀있고, 자전거에는 작은 빨간 깃발이 달려있다. 상단의 빨간 집을 지나며 그곳에서 깃발을 가져와, 살구색 집과 자전거에 달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이념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 때문인지 생각이 많다. 아마 빨치산 활동 속에서, 많은 동지와 양민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이념을 다시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민의 결과로 허상인 이념보단 실체인 사람을 우선에 둔 것이 아닌가 한다. 수색 중에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경찰인 김상욱을 살려준 것이 그 예다. 하단에는 붉은 지붕에, 살구색 본체로 된 집을 지나 그는 자전거를 타고 되돌아오고 있다. 위장 자수를 하고 간, 감옥에서 나와 구례에 정착하며 살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붉은 지붕에 살구색 본체라는 집은 분단을 의미할 수 있다. 또는 그런 집을 지나침으로써 공산주의(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속에는 사람이 없다는 이념적 냉소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이는 깃발에서 드러난다. 자세히 보면 깃발은 다르다. 살구색 지붕에 있는 깃발은 상단의 집에 있는 선이 그어진 붉은 깃발이지만, 그의 자전거에 있는 깃발은 그냥 붉은 깃발이다. 선이 있는 깃발은 오염된 사회주의 깃발을 의미한다. 선이 지워진 붉은 깃발은 오염이 제거된 순수한 사회주의, 그래서 기본이 중심이 되는 깃발로 보인다.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척을 하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사람은...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p15~16     


 여자 방물장수를 하룻밤 재워주는데 아내가 반대하자, 그가 아내를 설득하며 한 말이다. 그는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지만,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실체를 중요시했다. 그래서 물질, 즉 실체를 중시하는 유물론을 강조했다. 소설 곳곳에서 그가 유물론자로 불리는 이유이다. 그의 유물론에는 사람이 중심에 있다. 그러기에 감옥에서 나온 후 구례에 정착하며, 사람들 일에 기꺼이 나섰다. 이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없다면 힘든 일이다. 또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배신당하면, 그는‘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또는 사람은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말로 사람에 대한 이해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이해로 만든 줄이 구례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촘촘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졌다. 사람은 항꾼에(함께)’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실신한 인간관계 전체가 아버지 고상욱을 입체감 있는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골을 추억이 서린 장소마다 조금씩 뿌렸다. 사후에도 그는 구례라는 공간에 입체적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구례는 그녀에게 그리움의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카페에는 큰 창이 있다. 창밖으로 광장의 나무가 보인다. 무수한 잎의 변화로 계절이 저절로 읽힌다. 가지에 달린 잎들이 초록으로 짙어가고 있다. 그가 어느 계절에 떠났는지 기억도 희미하다. 오늘 같은 날이길 바랄 뿐이다. 그러면 덜 쓸쓸하게 기억될 것 같다. 다 마신 타미타세에는 여전히 크레마의 그리움이 묻어있다.     




<월요일에 업로드합니다>     

(표지사진은 픽사베이에서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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