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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소년 Apr 30. 2024

12. 그림자

              살인자의 기억법 (by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문학동네)     

 

 카페가 문을 닫았다. 이런 날도 있다. 휴무일을 잊고 허탕을 치는 날이. 커피는 다음에.

     


  표지에 있는 한 남자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그는 걷고 있다. 손에는 책이 들려 있다. 신발은 군화같이 두껍고 단단하다. 옷은 코트인데 가볍지 않다. 전체적으로 무겁다. 무거움 속에 불길한 무언가가 스며있다. 그 무언가는 길게 늘여진 그림자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림자는 표지를 사선으로 가르고 있다. 남자는 상단이 잘려있다. 그림자는 온전하다. 남자보다 그림자가 더 돋보인다.     

 

 그림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고, 빛과 함께 드러난다. 무의식을 탐험하며 그림자가 무의식의 한 층위라는 것을 발견한 정신분석학자가 있다. 카를 융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면서, 무의식은 여러 층위-그림자, 아나미-아나무스, 자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의식이 무의식에 대해 인지하기를 거부하면, 무의식은 보상작용을 일으켜 의식의 표면에 무의식의 존재를 표현한다. 이런 무의식의 보상작용마저 의식이 인지하기를 완고하게 거부할 때, 무의식은 과보상 작용을 일으켜 의식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정신적 해리 현상은 이에 따라 일어난다.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그림자는 의식이 만나는 무의식의 첫 번째 층위이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으로 지나치게 강조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 (그림자/이부영/한길사/p41)     


 즉, 그림자는 열등하다. 이런 그림자는 의식에 의해 의식화되지 않으면, 결국 악이 된다. 개인적 무의식 차원의 상대적 악이든, 집단적 무의식 차원의 절대적 악이든. 이 악에 잠식당한 자는 악마가 된다.      

 

 표지의 그림자에 눈길이 가는 것은 소설의 화자 때문이다. 나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가축들을 진료하며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수의사 김병수일까? 아니면 수의사 김병수의 내면 어두운 곳에 숨어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김병수일까? 즉, 융이 말한 그림자일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늘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나를 소심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거울 보며 표정을 연습했다. 슬픈 표정, 밝은 표정, 걱정하는 표정, 낙담하는 표정. 그러다 간단한 요령을 익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다.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었다. p34


 화자는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외부의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의 부재.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그림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그것은 가면이 필요했다. 소심하고 얌전한 얼굴을 가지고 부단한 노력과 요령으로 표정 있는 가면을 만들어 썼다. 이런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한다. 페르소나 또한 카를 융이 만든 용어다.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고대 그리스에서 연극할 때 쓰던 가면)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형이다. (그림자/이부영/한길사/p36)     


 ‘소심하고 얌전한 얼굴’, 이것이 공인된 수의사라는 사회적 직함을 가진 그림자 김병수의 페르소나였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완벽한 가면이었다. 이 가면을 쓰고 그림자는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가면 속의 그림자는 안다. 자신이 악마라는 것을.     


옛사람들은 거울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지. 그들이 거울에서 보던 악마, 그게 바로 나일 것이다. p34     

 

 그림자는 자신의 악을 은폐하기 위해 페르소나를 내세웠다. ‘소심하고 얌전한’ 페르소나는 사회적 통념의 선을 넘는 것에 주저주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선을 넘는데 거침이 없다, 이런 그림자와 페르소나의 관계는 표지에도 잘 나타난다.      

 

표지를 자세히 보면 무채색의 보도블록이 있다. 상단과 하단에는 붉은 블록이 있다. 붉은 블록은 가이드라인, 사회적 통념의 선이다. 남자는 그 안에 있다. 물론 걷고 있어, 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페르소나여서 넘기를 주저하고 멈출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붉은 블록을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사회적 통념을 넘어섰다. 하필 블록은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핏빛을 연상시키고, 핏빛은 살인이다. 사회적 통념의 가이드라인은 살인이었다. 그림자는 살인으로 질주한다. 그림자이기에 질주하는 연쇄살인에 도덕적 가책은 처음부터 없었다.      

 


 

 소설은 연쇄살인으로 질주했던 한 그림자의 방백이다. 아니 이 방백은 소설일까? 소설은 시간의 뼈대에 사건이라는 살을 붙여 만들어진다. 그런데 시간이 사라지고, 사건이 무너진다면 이는 소설일까? 또는 다른 무엇일까?      

 

 표지를 다시 본다. 그림자는 남자보다 길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다.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다. 시간의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시간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 부분이 소설에서 언급한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연상시킨다.     


... 무엇을? 귀환이라는 목적을 잊어버린다. 고향은 과거에 속해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미래에 속한다. 그후로도 오디세우스는 거듭 망각과 싸운다.... 세이런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어떻게?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그렇다면 박태주를 죽이겠다는 나의 계획도 일종의 귀환이 되는 셈이다. 내가 떠나왔던 그 세계, 연쇄살인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그리하여 과거의 나를 복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p117      

 

 표지의 그림자 방향은 시간을 의미하고, 시간은 미래를 향하며, 미래는 오디세우스 귀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되새김질 속에서 그림자는 알츠하이머의 의미 또한 발견한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이 고향이라는 과거를 향한 미래의 계획이고, 그를 현재에 머물게 하려는 망각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는 미래의 계획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망각이다. 망각은 사람을 무한의 현재에 갇히게 한다. 계획을 세우며 미래로 나아갈 수 없고, 과거 또한 잊기 때문이다. 현재에 갇힌 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그림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그림자는 박태주를 죽이겠다는 계획에 나름 정당성을 부여한다. 살인의 회귀로 인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그 계획마저 집어삼켰다.     

 



 소설의 주요 사건은 분명 살인이다. 과거의 연쇄살인과 현재, 요양보호사 김은희의 살인이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최근의 일부터 하나하나 기억으로부터 떼어내어 삼켜버린다. 김은희의 살인부터 그의 기억에서 삭제한다. 그러다 보면 만나는 건, 그의 첫 살인인 친부 살인이다. 여기서 오이디푸스가 오버랩된다.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엔 그 행위마저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학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프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p129     


 오이디푸스는 파멸하였지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스스로 치르며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그는 파멸이 아닌 알츠하이머로 인한 무지로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기회를 상실했다. 그래서 살아있으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이 된다. 이를 그는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종국엔 그 사실마저도 알츠하이머는 삭제시킬 것이다. 알츠하이머가 삭제한 것은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이 삭제되면서 그림자도 사라진다. 그림자도 사라지면서, 사건도 그의 방백 속에 남아있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는 모든 것을 삼켰다. 페르소나와 그림자, 시간과 사건. 즉, 알츠하이머는 망각을 통해 시간을 이해할 수 없는 현재에 묶어두고, 가까운 과거의 행위부터 하나하나 무의미한 현재라는 시간의 칼날로 싹둑싹둑 자르며 한 인간을 티끌로 만들었다.     

 

 시간을 알 수 없고, 사건도 기억할 수 없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믿어야 할까? 그의 방백은 연쇄살인을 했던 그림자가 아니라, 알츠하이머를 앓아 자신을 잃어가는 자가 지어낸 망상의 무의미한 이야기는 아닐까? 망상의 이야기 속에서 소설은 사라지고 남는 건, 짧은 글인 아포리즘이 아닐까? 책을 다시 펼쳐본다. 아무리 봐도 아포리즘 같다.      


<‘표지는 없다’ 시즌 1은 다음 회차의 에필로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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