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21코스와 1코스 일부 / 둘째 날, 1-1(우도) 코스와 나머지 1코스 / 셋째 날, 2와 3코스
여러 이유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곤함에, 조금씩 금이 가는 느낌의 몸으로 김포공항에 갔다. 6시 45분에 출발해서 8시쯤에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비행 중에 30분 정도 잤다. 그럼에도 금 간 몸은 붙지 않았다. 바로 버스를 타고 21코스 공식 안내소로 갔다. 안내소에서 21코스 와펜을 사고, 안내원이 추천한 식당(돌담칼국수)에서 밑에 죽이 있는 보말칼국수를 먹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먹은 유일한 음식물이다. 너무 지쳐서인지 배는 이상하게 고프지 않았다. 다만 피곤할 뿐이었다. 몸이 안 좋은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 다리가 특히 그랬다. 다리는 뻣뻣해지고 무거웠다. 지미봉 때문인지 무릎은 주기적으로 통증의 공격을 받았고, 평발이라 발바닥은 어느새 딱딱해지고 열이 났다. 게다가 물도 다 마셨다. 1코스 일부를 걷는 계획과 컨디션 난조로 숙소를 향한 욕구 사이에서 결정은 방황하고 있었다. 21코스 종점, 오후 3시였다.
1코스를 단순화하면 좌우가 바뀐 알파벳 C (Ↄ)처럼 보인다. 1코스 시작점이 있는 상단에서 구부러진 어느 지점과 21코스 종점인 종달바당은 만난다. 이 접점에서 1코스 시작점을 향해 역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1코스는 역방향으로 걷지 말라고 한다. 순방향으로 걷어야 성산일출봉을 계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직선일 때 해당한다. 곡선에서는 역방향으로 걸어야 성산일출봉을 볼 수 있다. 쉬려는 욕망을 죽이고, 계획대로 걷기로 한다. 내일 아침, 종달바당까지 버스로 이동해서 1코스 종점으로 내려가면 된다.
종달리 마을 길이다. 코스를 벗어난 돌담 밑에 수줍게 서 있는 A 보드가 보였다. ‘소심한 책방.’ 인터넷으로 21코스를 검색했을 때 우연히 본 책방이다. 여행지에 독립서점이 있으면 둘러보고 책을 구입한다. 내 나름의 규칙이다. 그러나 ‘소심한 책방’을 잊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코스에서 벗어나 가봤다. 돌담 위에 작은 분홍 간판이 수줍게 꽂혀있다. 건물은 창고를 개조한 듯했다. 서점 입구에 의자가 있고 젊은 여성 손님이 앉아 커피와 함께 책을 읽고 있다. 뜰에는 여성 노인 두 분이 이젤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를 지나 한 사람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분위기가 따뜻하다. 분야별로 책도 잘 정리되어 있다. 주인에게 ‘외로움의 습격’을 물었다. 7월에 있을 독서토론을 위한 책이다. 불행히도 없었다. 대답하는 주인을 보고, 왜 소심한 책방인지 알았다. 다른 책을 사려고 다시 둘러봤다. 페르난두 폐소아의 ‘불안의 서’가 보였다. 상당한 두께의 책이다. 아쉽게도 배낭에 넣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살지 말지 한참 고민을 했다. 올레길 내내 배낭을 메고 다녀야 한다. 무게를 더 늘릴 수 없어 사는 것을 포기했다. 주인에게 미안해서 나도 소심하게 조용히 나왔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소심한 책방 외관>
<소심한 책방 내부>
원래 코스로 돌아와 걸었다. ‘종달리 소금밭 체험시설’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소금밭’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일어,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읽었다. 종달리는 염전마을이었다. 그러나 육지의 천일염이 들어오면서 수지가 맞지 않자 염전지는 논밭이 되었다. 예전 마을의 흔적을 이 건물이 보존하고 있다. 마을 길은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해서 예뻤다. 그 길에서 스치듯 만난 ‘책약방’. 너무 궁금했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무척 작아 보였고, 그래서 단순히 구경을 위해 들어가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사진도 정면으로 찍지 못했다. 안에 주인이 앉아있는데 정면으로 마주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옆에서 비스듬히 찍었다. ‘책약방’이니 책을 수리해 주는 곳인가? 아니면 서점인가? 무척 궁금했다.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무인 셀프 책방이었다. 그러니 안에 있던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었다. 소심해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종달 염전 / 책약방>
마을 길이 끝난 곳에 청보리밭이 있다. 청보리? 하도 해수욕장에서 보았던 누런 보리는 무엇이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보리는 절기 중 망종에 수확한다. 망종은 양력으로 6월 6일 무렵이다. 망종 때 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한다. 5월 하순이니 청보리가 이상한 것이다. 그래도 푸릇푸릇한 청보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조금 더 걸으니 알오름이 보인다. 오름이 새 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산메라고도 한다. 이어진 오름은 말미오름이다. 말의 머리를 닮았다는 의미이고, 두산봉으로도 불린다. 알오름과 말미오름의 길은 완만해서 지미봉보다는 좋았다. 내가 생각한 오름의 모습이었다. 지미봉은 정상에 오를 때까지 풍경을 볼 수 없었다. 나뭇가지로 두른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반면 알오름과 말미오름은 벌판 같은 평야가 비스듬히 펼쳐져 있다. 오를 때 뒤돌아보면 조금씩 변하는 내륙 쪽의 초록 풍경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지미봉에서 본 풍경이 다시 펼쳐진다. 바다와 우도, 성산일출봉 그리고 시흥리 마을 풍경.
<오름, 내륙쪽 풍경>
오름에서 이상한 것을 통과했다. S자 형태의 통로였다. 사유지여서 그런가 했다. 올레에는 사유지가 있어 사유지를 두른 경계 철조망 사이에 이런 올레 통로가 만들어졌나 생각했다. 나중에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들었다. 오름에는 말과 소가 방목되어 있고,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통로를 S자 형태로 만들었다고. 사람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오름, 해안쪽 풍경>
말미오름에서 내려오니 올레 1코스 안내소가 있다. 걸으며 지도를 많이 보아서인지 지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러 한 부를 더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지도와 함께 다른 것도 구입해야 했다. 바로 와펜이었다. 이것 때문에 마지막 날 3코스 종점을 5km 남겨두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뛰었다. 놀멍쉬멍하며 천천히 걸으라는 올레에서.
시흥리 버스정류장에서 201번 버스를 기다린다. 오후 4시 30분,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로 입실 예정을 알렸다. 얼마 후 버스가 왔다. 일어나려니 하체의 관절들이 삐걱거린다. ‘끙’, 신음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직전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버스에 올라탔다. 빈자리에 앉자마자 생각 하나가 머리에 스민다. 풍경은 눈동자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쓱쓱 지나갔다. ‘왜 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걸까?’ 몸은 21코스 종달바당에서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서 쉬어야 했다. 그럼에도 1코스 시작점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체력을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걸었다. 그나마 두 개의 오름이 완만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오늘만 걷는 것도 아니고 내일도 모레도 걸어야 하니 컨디션 조절은 중요하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니, 내일 1코스를 시작점에서 걸어도 된다. 계획을 수정하면 될 터였다. 무엇이 수정을 막았을까?
숨겨진 민얼굴이다. 홀로 있을 때 내미는 얼굴이다. 목표지향적인 얼굴. 목표를 세우면 최선을 다한다. 다른 것은 보지 않는다. 그놈의 최선이 나를 몰아세운다. 이런 것이 혼자 하는 올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혼자 하기에 제어가 되지 않았다. 21코스 종점에서 그 얼굴이 계속 속삭였다. 계획대로 하자고. 이렇게 하면 내일이 편하다고. 내일을 위해 오늘은 포기하라고. 항상 이랬다. 뒤돌아보면 나의 오늘은 내일에게 항상 저당 잡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면 내일은 편했을까? 내일이 오늘이 되면 그 오늘은 또 쉬지 못했다. 다른 내일을 위하여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편한 내일'은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언급되는 ‘고도’ 같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실존의 여부도 모르고, 끝내 등장하지 않는 기다림의 대상인 고도. 이게 나의 내일이다. 정말, 내일 나머지 1코스와 1-1코스인 우도는 편할까? 확신에 벌써 자신이 없어진다.
그런데 다른 이와 함께 할 때는 다르다. 소심한 현실주의자가 된다. 대부분 상대방에 맞춘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관대해진다. 날 몰아세우지 않는다. 만약 21코스 종점에서 함께한 이가 있어 ‘너무 힘드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라고 했다면, 나는 멈췄을 것이다. 항상 변수는 있고 변수가 발생하면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연한 모습일 수 있지만, 분쟁이 싫어 상대에게 맞추는 소심한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런 모순된 얼굴이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혼자와 함께 사이에서 얼굴이 다른 이유를 조금은 안다. 그리고 모순된 나 또한 나이기에 이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다.
여행이란 이런 것 같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가식이 없는 자신의 민얼굴을 만날 것이다.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한 얼굴일 수 있지만, 때론 정말 가혹한 얼굴일 수도 있다.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관계 속에 있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볼 것이다. 함께하는 이에게 친절한 페르소나일 수 있지만, 가증스러운 가면일 수도 있다. 이런 두 얼굴이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다를 것이다. 여행은 이 얼굴들을 적나라하게 대면하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성산리 입구’라는 멘트가 나온다. 내리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또 ‘끙’ 소리를 길게 내며 일어섰다.
숙소는 정류장에서 2~3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전망좋은게스트하우스’. 왜 ‘전망좋은’인지 3층에 올라 창문을 보는 순간 알았다. 바로 눈앞에 성산일출봉과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옆을 보니 젊은 외국인 한 명이 침대에 누워있다. 6인실 도미토리라 그랬다. 1박에 2 만원, 연박을 신청했다. ‘Hello’, 단 한마디만 하고침묵이 이어졌다. 나름 영어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색했는지 그가 먼저 나갔다. 침대를 정하고 짐을 정리한 후 샤워를 하고 누웠다. 너무 지쳐서 그런지 저녁 식사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함께했다면 맛집을 찾아 먹었을 테지만, 혼자이다 보니 그런 수고를 하기 싫었다. 그저 배만 채우면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본 성산일출봉, 주차장에서 본 성산일출봉>
저녁 식사를 싼 것으로 해결한 후 성산일출봉 쪽으로 향했다. 카페를 찾기 위해서다. 커피가 정말 간절했다. 그런데 카페는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이렇게 일찍 문을 닫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후 6시 30분이 지났을 뿐인데. 성산일출봉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이 매우 넓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것이겠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늦은 오후의 주차장은 늦가을 분위기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녁 시간에는 손님이 없어 카페들이 빨리 문을 닫는 것 같았다.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긴 한데, 여기도 7시 30분에 문을 닫는다. 여유 있게 마시질 못할 것 같아 커피를 잠시 포기했다.
<주차장에서 본 노을>
성산일출봉의 빈 주차장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노을이 집들과 상가들을 가르는 골목으로 시나브로 내리고 있다. 새벽의 황금빛은 가공되지 않은 원시성의 명징한 일출이다. 저녁녘의 노을은 무두질이 잘 된 부드러운 금빛이다. 주차장이 어두워질 때까지 서서히 지는 노을을 마냥 쳐다봤다. 성산리가 어둠에 잠기자 커피에 대한 욕구가 다시 밀려왔다. 커피를 마셔야 하루가 마무리될 것 같았다. 편의점 GS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숙소로 갔다. 다른 룸메이트가 있을까? 있다면 누구일까? 내향인이라 그런지, 설렘보단 긴장이 몸으로 전해져 왔다. 받은 잔이니 마셔야겠지. 올레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어 갔다. (2024.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