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핸드폰을 보니, AM 6시 20분. 옆 침대의 젊은 외국인은 자고 있다. 샤워하는 이는 자전거 라이더일 것이다. 그는 60대 중반이고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를 가졌다. 어제 8시 넘어서 들어왔다(내가 들어온 후 나간 젊은 외국인은 우리가 잘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 무척 긴장한다. 듣는 것에 특화되어 있어 대화에 무척 서툴기 때문이다. 가장 난처한 상황은 대화가 갑자기 끊긴 후 찾아오는 어색한 침묵이다. 침묵은 공간을 무채색으로 경화시킨다. 나는 당황하고 틈 하나 없는 침묵의 밀도에 심장이 멎는다. 물론 친한 이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그 자체로 좋은 대화가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낯선 이와는 아니다. 그래서 말 많은 이가 좋다. 다행히 그는 말이 많았다. 나는 주로 들으며 호응했다. 그는 자전거로 전국을 돌았고, 이번 제주도는 비슷한 연배의 여성 다섯 분과 돌고 있다고 했다. 제주도는 자전거로 4일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도 자전거로도 돌아보라고 권했다.
<운무에 덮인 성산일출봉>
사실 5시 30분에 일어났었다. 성산일출봉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그는 침대에 없었다. 어젯밤 그는 새벽에 성산일출봉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벌써 갔나 보다 했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운무에 싸여있었다. 운문 때문에 성산일출봉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성산일출봉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약을 먹고 다시 잤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나를 본 그는 성산일출봉에 가보라고 했다. 자신은 갔다 왔는데,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있는 운무를 볼 수 있고 그 풍경은 운치가 있다고 한다. 후회되었다. 가볼걸. 7시 이전에 가면 무료라는 팁까지 알려줬다. 좀 더 미적거리다 가보기로 했다. 7시 전까진 무료라는 말도 날 일어나게 했다. 어제 무리한 탓인지 몸이 삐걱거렸다. 그래서 천천히 걸었다. 매표소 정문에 가니 6시 50분. 내 앞에 있는 한 가족이 매표소 직원에게 7시 전이니 그냥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다, 결국에는 표를 끊고 들어갔다. 무료는 매표소 직원이 출근하기 전까지였다. 그것을 보고 되돌아왔다. 숙소에 들어오니 룸메이트들이 없다. 그사이 모두 떠난 것이다. 난 침대에 누워 있다, 여유 있게 샤워하고 나설 준비를 했다. 조식으로 제공되는 토스트를 먹자마자 나왔다. 어제보다 배낭이 가벼웠다. 옷가지들을 침대에 놓고 나왔기 때문이다. 어제 배낭의 무게 때문에 못 산 ‘소심한 서점’의 ‘불안의 서’가 아쉬움에 떠올랐다.
성산항에서 9시에 출항하는 우도행 배를 타기 위해 걸었다. 햇살이 따갑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20분을 걸어 도착했다. 8시 50분. 급하다. 승선신고서를 작성하고 왕복 탑승권을 구매했다. 급히 배에 올라타니, 수학여행을 온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배를 점령하고 있다. 배의 어느 곳이든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한 시절을 남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2014년 4월의 일이 잠시 떠올랐다. 9시가 되어도 배는 출항하지 않았다. 바다에 짙게 끼어있는 안개 때문이었다. 우도가 보이지 않았다. 출항 지연에 대한 안내방송이 계속 나왔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을 보며 기다렸다.
<성산항에서 우도로>
드디어 배가 출항한다. 40분 정도 늦었다. 성산일출봉을 둘러싼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거의 사라질 때쯤 배는 우도에 도착했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리고 나서 1-1코스 시작점 간세를 찾았다. 보이지 않는다. 안내소에 가서 물었다. 비 가림 여객 통로에 있는 황소 동상 옆에 있었다. 맘이 급해진다. 안개로 인해 출항이 늦어져 그런 것 같았다. 일정이 꼬이지 않을지 내심 걱정되었다. 얼른 스탬프를 찍었다. 도로로 나오니 색상이 다양한 삼륜차가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기웃거리고 있다. 나는 눈길을 거두고 올레 리본을 찾았다. 시작은 해안 길이다. 얼마 걷다 보면 길은 내륙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말들을 보았다. 마부가 말 세 마리를 끌고 어디로 가고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길을 걷는 말은 처음 본다. 말과 우도라. 어디서 읽은 것 같았다. 숙종 때 우도를 말 사육장으로 지정해서 말을 관리했다는 것을.
날이 맑다. 빛은 사물에 드리운 어제의 우울을 증발시켰다. 색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파란 하늘을 물들이지 못한 에메랄드빛이 바다에 풀어져 있다. 녹색의 무거움이 에메랄드빛을 하늘로 번지지 못하게 한 것 같다. 파란 하늘에는 분필로 그은 듯 하얀 비행운들이 여러 굵기의 선으로 날고 있다. 길에는 검은 돌담을 뒤덮고 있는 분홍 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다. 낮달맞이꽃이다. 달맞이꽃은 밤에 피는데, 낮에 피기에 낮달맞이꽃이라 이름을 붙인 것 같다. 꽃에는 한 여인의 사랑이 스며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슬퍼하다 죽었다. 그녀가 매번 소원을 빌었던 곳에 이 꽃이 피었다. 무언의 사랑, 보이지 않는 사랑이 꽃말이다. 비극적 서사지만 오랜 시간에 단련된 듯 그녀의 꽃은 원숙한 미소로 피어있다.
우도가 좋다. 아늑하고 정겹다. 밭담이 낮은 길을 걷는다. 서편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돌담으로 된 밭길을 주인공 세 명이 걷고 있다. 유봉과 송화가 즐겁게 판소리를 하고 동호는 장구를 흥겹게 치고 있다. 이때가 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장면이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있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웠던 때가 있다. 그러나 지나야 안다. 그때가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것을. 배에 있던 여고생들도 그럴 것이다. 풍경은 나에게도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았다. 1초 전의 순간이 아닌, 움직이고 느끼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 말이다. 사방이 탁 트였다. 그 개방감에 나도 활짝 열려 풍경이 되었다.
<서편제/네이버 영화 서편제 포토 참조>
하고수동해수욕장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근처에는 중간지점 스탬프가 있다. ‘범선밥집’ 앞이라는데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포장 때문에 장비 차들로 붐볐다. 두리번거리다 움직이는 장비 차 사이로 간세가 보였다. 스탬프를 찍는데 위험을 느꼈다. 도로포장에 사용되는 롤러 차가 바로 뒤에서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칫 사고가 날까 걱정되어 급히 스탬프를 찍고 자리를 떴다. 중간지점 스탬프에서 조금 더 걸으면 해안 길이다. 그쯤에서 커피가 너무나 간절했다. 주위를 봤다. 커피를 팔 것 같은 가게가 보였다. 메뉴에 식사만 있고 커피는 콜드브루뿐이다. 나는 계절에 상관없이 뜨거운 아메리카노 또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어쩔 수 없이 콜드브루를 가지고 풍경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조금 쉬었다.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잠시 후 직원이 왔다. 커피는 테이크아웃만 되고 테이블은 식사만 할 수 있다고. 아까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무척 미안한 모습으로 얘기를 했다. 이해하는 맘이 들기도 하면서 언짢은 맘이 들기도 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왠지 무안했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커피를 들고 바로 나왔다.
<하고수동해수욕장>
무안 때문인지 걸음이 빨라졌다. 얼마쯤 걸으니 왼쪽으로 다리가 보였다. 비양도로 가는 다리였다. 고민을 했다. 비양도를 돌아보고 다시 올레를 걸을까? 무시하고 걸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비양도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후에는 1코스의 나머지 길을 걸어야 했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목표지향적인 내 성격이 또 모습을 드러냈다. 목표를 세우면 모든 것이 그것에 맞춰진다. 자잘한 선택의 순간에도 그 얼굴은 자신을 드러낸다. 끼니를 때우는 것, 길 위에서 짧은 쉼표를 찍는 것, 물 한 병 사는 것에서조차 그 얼굴을 보게 된다. 일상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 혼자 하는 올레에서는 작은 걸림돌이 되어 지겹도록 그 얼굴과 대면하게 된다.
비양도를 지나치고 걸었다. 우도특별시라는 펜션을 끼고돌아 다시 내륙으로 들어갔다. 지나오면서 땅콩이라는 단어를 많이 보았다. 땅콩 막걸리와 땅콩 아이스크림 같은. 땅콩이 우도의 특산물인 것 같았다. 찾아보니, 우도는 해풍의 영향으로 마늘과 땅콩이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영양가도 높고 맛도 고소한 땅콩은 1986년부터 재배되었고, 일반 땅콩보다 작아서 껍질째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 우도에 가면 땅콩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했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60대 중반의 부부가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가고 있다. 땅콩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야 했는데, 먹지 못했다. 여유가 없었다. 아이스크림 먹을 시간조차 나 자신에게 부여하지 못했다. 한번 콜드브루로 부려본 여유는 가게에서 쫓겨났다. 시간적 여유보다 심리적 여유가 더 없었다.
<더 랍스터 / 네이버 영화 포토 참조>
섬이기에 내륙 길은 순환이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바다와 만난다. 지금 걷고 있는 밭과 숲 길의 접점에 우도등대가 있다. 등대는 쇠머리오름의 정상에 있다. 오름의 시작점에는 방목된 말들이 있고, 바람이 불면 스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풀 속으로 오르막길이 나 있다. 시작점부터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던 한 남자가 먼저 오르고 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던 부부가 내 뒤를 따르고 있다. 뒤돌아보니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고 같이 오르고 있다. 영화 ‘더 랍스터’의 포스터가 떠올랐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손을 잡고 바람이 느껴지는 누런 갈대밭을 걷고 있는 풍경.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는, 독특한 설정의 영화였다. 오늘 하루라는 시간의 제한이라면 부부는 동물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앞서가는 남자와 내가 동물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신화에서 사랑의 실패는 대부분 식물성으로 표현된다. 다프네의 월계수, 달맞이꽃, 말리꽃인 재스민의 이야기가 그렇다. 꽃 아니면 나무로 변한다. 영화는 사랑의 실패를 동물의 변신이라는 동물성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도망친 솔로들은 동물처럼 사냥당한다. 역설적으로 사랑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는 것일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일까?
영화의 열린 결말도 생각해 본다. 콜린 파렐은 장님이 된 레이첼 와이즈를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를까? 나라면 찔렀을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사랑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형태가 다른 각자의 사랑이다. 그러니 콜린 파렐이나 레이첼 와이즈의 사랑 또한 색채가 다르게 빛날 뿐, 그것도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그만큼 사랑의 형태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부는 천천히 자신의 속도에 맞게 오르고 있다.
<좌: 우도저수지와 지미봉 / 검멀레해변>
<좌측 중앙에 부부가 살짝 보인다>
오르며 또 뒤돌아보았다. 우도 내륙의 전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직사각형의 우도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마을, 바다 그리고 종달리에 있는 지미봉이 눈에 들어왔다. 능선에 도착하면 반대편은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이다. 제주 말로 검은 모래라는 의미의 검멀레해변, 해변의 검은 바위에 부서져 더욱 대비되는 하얀 파도, 그리고 에메랄드빛 바다에 하얀 물결을 파내는 보트가 보인다. 내가 풍경 사진을 찍는 사이 부부가 올라왔다. 그들은 함께한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힘들어했다. 결국 내가 찍어드렸다. 이들을 비양도 다리가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아니라 콜드브루 가게가 있던 부근부터 보았던 것 같았다. 먼저 간 남자, 부부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부터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걸었다. 그러나 누구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타인을 향한 침묵이 올레의 규칙처럼.
<사자바위>
우도등대와 등대 공원을 지나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조급했다. 1시에 출항하는 배를 타고 우도를 떠날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12시 30분. 급하게 내려가 항구에 닿았다. 12시 55분. 배에 승선하고 나서야 알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배가 파도에도 몹시 흔들렸다. 나도 많이 흔들렸다. 계획도 흔들려 일부가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