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출항하지 않는다. 1시가 넘었는데 이상하다. 사실 배에 오르기 전에도 이상했다. 1시에 출항하는 배를 타기 위해 정신없이 항구에 왔다. 종점 스탬프 간세를 찾았으나 오전하고 위치가 달랐다. 오전에는 비가림 통로 안에 있는 황소 동상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오후에는 항구로 뻗은 제방 입구에 있었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급한 마음에 스탬프를 빨리 찍고 승선했다. 그런데 그때의 찜찜함이 지금 밀려오고 있다. 머리는 생각이 엉켜 엉망이다. 치는 파도에 배가 몹시 흔들린다. 선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흔들림은 내 엉킨 생각을 풀어 항구 이름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눈을 감았다.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다. 북쪽엔 하우목동항, 남쪽엔 천진항. 우도 올레는 하우목동항에서 시작하면 하우목동항서 끝나고, 천진항에서 시작하면 천진항에서 끝난다. 이것을 잊고 있었다. 오전에 성산항에서 배를 탈 때 어느 항구로 가는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 잘못 끼운 단추였다. 승선한 후 오전에 찍은 배의 사진을 보니 행선지는 하우목동항이었다. 여기는 천진항이다. 그래서 항구의 모습이, 간세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천진항은 1시 30분에 출항한다. 1시에 출항하는 곳은 하우목동항이다.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했다. 지도를 보니 천진항과 하우목동항 사이의 거리는 우도 올레길에서 1/4, 적어도 1/5을 차지한다. 적지 않은 거리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나머지 우도 올레길을 패스하고, 성산항으로 가서 오늘 전체일정을 온전히 해내는 것과 전체일정과 상관없이 하선해서, 나머지 길을 걸어 우도 올레를 완전히 완성하는 것이다. ‘완전히’ 보다 ‘온전히’를 선택했다. 비록 중간이 끊기긴 해도 계획한 시작과 끝을 온전히 해내고 싶었다. 계획한 끝을 보지 않고 중간에 끝내는 것이 싫었다. 하선해서 하우목동항까지 걸으면 오늘은 1코스를 마무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배를 타기 전이었으면 걸어서 1-1 코스를 ‘완전히’ 완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출항 5분 전이다. 그냥 가야 한다.
<원 안에 하우목동항, 홍조단괴해빈, 천진항이 보인다>
배는 1시 30분에 출항했다. 선실에 누워 패스한 올레길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지 카카오맵으로 확인했다. 중간 부분에 백사장인지 하얀 부분이 보였고, 그곳에 있는 ‘홍조단괴해빈’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상상하기 쉽지 않은 단어다. 검색해 봤다. ‘홍조’는 붉은빛 또는 자줏빛을 띠는 해조류이고, ‘단괴’는 어떤 특정 성분이 압축되어 단단해진 덩어리이다. 그리고 ‘해빈’은 해수욕장의 지형상 이름이고 영어로는 beach이다. 간단히 종합해 보면, ‘홍조단괴해빈’은 붉은 바다 식물이 단단해져 돌덩이가 되고, 이런 돌덩이들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으로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자연유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2004년 4월 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가보고 싶다. 가야 느낄 수 있고, 느껴야 이해할 수 있다. 가보지 못해 정말 아쉽다.
성산항에서 하선한 후 성산초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201번 버스를 탔다. 종달초등학교에 내려 종달바당까지 걸었다. 종달바당에 거의 도착했을 때 여성 3명이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들은 1코스 시작점에서부터 걸어온 것 같았다. 앞질러 갔다. 21코스 종점인 종달바당이 나에겐 오늘 1코스 시작점이다. 지도를 보니 1코스는 여기서부터 종점인 광치기 해변까지 해안 길이다. 걷는데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여성팀이 21코스 종점을 1코스 중간지점으로 착각하고 스탬프를 찍으려 하자, 누군가 아니라고 말하며 말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잠깐 뒤돌아보고 그냥 걸었다.
조금 걸으니 목화휴게소가 보였다. 올레 1코스를 검색하면 언급되는 곳이다. 갔다 온 이도 꼭 가보라고 했다. 어제 수요일이 목화휴게소가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들르기 위해 21코스를 어제, 1코스를 오늘 돌게 된 것이다. 이곳은 한치구이가 유명하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어보라고 했다. 휴게소라 해서 고속도로에 있는 멋진 휴게소를 생각하면 안 된다. 시골에 있는 작은 가게 수준이다. 좋게 말하면 빈티지하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더 끌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도착했을 때 휴게소 앞에 놓아둔 테이블과 의자에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치 한 마리와 술을 못 마시니 밀키스를 주문했다. 진동벨을 준다. 좀 당황했다. 진동벨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가게와 진동벨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동벨을 준다는 건 그만큼 주문이 많다는 의미일까? 벨을 받고 나왔다. 가게 앞에서 한치와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기다리는 이들 중에서 올레길 위에 있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다들 옷차림이 깔끔하거나 편했다. 올레길 차림이 아니었다. 등산복 입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자리가 없어 옆 컨테이너로 갔다. 문은 닫혀있고 쓸모를 다해 버려진 듯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다행히 앞에 테이블(손님을 위한 것은 아니고 버려진 응접실용 작은 테이블이다)과 의자도 있다. 여기로 그늘이 드리웠다.
<목화휴게소와 그 앞바다 / 멀리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10분쯤 지나자 진동벨이 울렸고 오징어와 밀키스를 받아왔다. 조금 느긋하게 한치를 씹고 음료를 마시며 작은 여유를 즐겼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여유 없이 걷기만 했다. 밥도 전투적으로 먹고 바로 걸었다. 음미는 없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음미해 본다. 정면에는 2차선 도로가 있고, 도로 경계석 위에 있는 줄에 건조를 위해 한치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다. 그 너머로 초록의 해초에 덮인 해변이 보이고, 해변은 조용히 푸른 바다를 받아내고 있었다. 멀리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흐리게 보인다. 잠시 후 그 여성팀이 보였다.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목화휴게소에 1코스 중간지점 스탬프가 있다. 나는 한치와 음료를 기다릴 때 찍었다. 여성팀을 불러 여기가 중간지점 스탬프가 있는 곳이라고 알려줬다. 그녀들은 고맙다고 말하며 찍고 갔다. 그 뒤로 남자 두 명이 각각 찍고 갔다.
20분을 더 있다 쟁반을 반납하고 걸었다. 내륙으로 작은 호를 그린 해안 길이다. 성산일출봉은 1코스 기준점인 것 같다. 어디서나 보인다. 걷다 보니 어느새 성산항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전에 먼저 1코스를 걷고, 여기서 우도를 다녀와서 다시 1코스를 걸어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나간 일이다. 작은 언덕을 넘으니 HAEILRI와 함께 성산일출봉의 왼쪽 절벽이 보인다. 어제는 성산일출봉의 정면과 오른쪽 면을 보았다. 정면의 솟은 봉우리와 오른쪽 절벽은 위압적이지 않았다. 안정성이 담보된 평지에서 봐서 그런지 편했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왼쪽은 다르다. 왼쪽 절벽을 보며 걷는 길도 바로 밑이 바다로 향하는 절벽이다. 절벽이 있는,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길에서 본 성산일출봉의 왼쪽 절벽은 크게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성산일출봉 주차장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중국인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었다. 내일 새벽에 이곳에 와서 오르리라 생각하고 지나쳤다. 숙소를 지나자 카페 하나가 보였다. 성산일출봉으로 향한 커다란 창이 있는 카페였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제대로 된 따듯한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한 잔 마셔야겠다. 길은 광치기 해변으로 들어섰다. 해변엔 수학여행 온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이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1코스 해안 길은 어제 걸었던 21코스와는 달랐다. 21코스 해안 길은 쓸쓸했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모르겠다. 게다가 걷는 사람도 없고 길 주변엔 뭔가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밭이었다. 카페나 식당은 서로를 알지 못할 만큼 드문드문 있었다. 그 사이의 공간을 고요가 채우고 있었다. 고요가 흐린 하늘과 만나 적요가 되었다. 내면으로 향한 길이었다. 이런 회색빛의 공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좋았다. 반면 1코스의 해안 길은 달랐다. 곳곳에 있는 카페나 식당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거리에 있었다. 돋보이고 싶어 했다. 겉보기엔 고요했지만 속엔 서로의 이야기들로 웅성웅성 들끓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이 고요를 걷어내고 소곤거리는 소란을 드러냈다. 밖으로 향한 길이었다. 목화휴게소 또는 카페의 소곤거림은 HAEILRI에서 그네에 실린 웃음으로 하늘에 뿌려졌다. 소란은 두 개의 작은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짧은 고요. 성산일출봉 주차장에서 관광버스에서 내린 중국인들의 데시벨 높은 중국어와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까르르’ 가볍고 즐거운 떠들썩함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만났다. 주차장에서 다시 드러낸 어수선한 소란은 광치기 해변의 바다에 내려 하얀 포말로 부서졌다. 포말에 놀란 수학여행 온 다른 학생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지른 짧은 외비명과 경쾌한 웃음은 다시 하늘로 올라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소곤거리는 소란은 변주를 거듭하다 하늘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다른 소리의 형태로 다시 내릴 것이다. 난, 그 소란에 소리를 보태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그런 소란은 여전히 낯설다.
<터진목 4.3 유적지>
<평화로운 광치기 해변>
광치기 해변 길은 터진목에서 도로로 빠졌다 얼마 안 가 다시 해변으로 방향을 튼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표지를 보고 잠시 도로로 빠진 이유를 알았다. 바로 터진목 4.3 유적지. 생각해 보니 방금 지나온 도로변에 4.3 사건 관련 글들이 많았다. 해변 입구에서 조금 걸으면 왼쪽에 제주 4.3 성산읍 추모공원이 있다. 광치기 해변으로 계속 걸었으면 이곳을 못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러 구부러진 길을 만들어, 4.3 사건이라는 제주의 슬픈 역사를 잠시나마 생각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4.3 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 자세히 모르기에 그 아픔을 진정으로 느낄 수 없다. 책의 제목만 알고 책의 본문은 읽지 않아 모르는 것과 같다. 매우 부끄럽다. 해변에 사람을 태운 말이 시원하게 달리고 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런 풍경이 그려진 현재라는 벽지를 확 뜯으면 제주의 슬픈 역사가 그려진 벽과 마주할 것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로 시작해야겠다. 1코스 종점 간세를 향해 간다. 오후 4시 30분. 시간이 이르다. 또 목소리가 들린다. 더 걷자.(2024.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