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30분. 광치기 해변에 있는 1코스 종점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숙소로 돌아가기엔 너무 이르다. 일행이 있었다면 저녁을 즐기기에 적당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이기에 그 시간은 진공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진공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증발시킨다. 그리고 남는 건 공허. 공허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리식톤 같다. 그는 데메테르 여신에게 굶주림이라는 형벌을 받아, 자신의 딸을 노예로 팔고 자신마저 먹어 치운 끝에 치아만 남겼다. 공허는 에리식톤처럼 자신마저 갉아먹는다. 내 20대 초반이 그랬다. 어디에 적을 두지 못해 뿌리 뽑힌 나에게 모든 것은 사라지고 공허만 남았다. 그리고 불면의 밤에 대면하는 공허에서 한기를 느끼곤 했다. 한기는 당시 내가 느낀 세계의 온도였다.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온기 없는 세계. 어쩌면 내 안의 온도였는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세계 대신 만만한 나 자신에게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를 갉아먹었다. 이때 느꼈던 공허의 한기는 삶의 마디에 깊게 새겨져 있다. 오늘은 공허를 불러오는 그 진공을 만들고 싶지 않다.
사실, 오늘 목표한 것을 온전히 끝냈다. 1코스와 불완전한 우도 1-1코스. 숙소로 돌아가도 된다. 그런데 싫었다. 불안했다.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공허에 대한 직감. 그럼 2코스 초반을 돌자. 내일이 편할 것이다(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지도를 다시 봤다. 2코스 초반의 지형은 그리스 문자 오메가Ω를 닮았다. 식산봉을 반환점으로 내수면 주변을 도는 지형이다. 돌면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직선으로 가면 2~3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건 유혹이다. 스탬프를 찍어 그냥 완주를 목표로 한다면 직선으로 가도 된다. 불량 완주.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도에서 나도 불량 완주를 했다. 이것 때문인지 심리적 정당성을 추인받고 싶어 식산봉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수면 / 육안으로 본 것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수면 둑길을 따라 걸었다. 갑자기 내수면이라는 명칭이 궁금했다. 어떤 유래가 있나? 예상과는 달리, 내수면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다. 즉 지금 걷고 있는 이곳에만 붙여진 명칭이 아닌, 이런 형태라면 어디나 붙는 용어였다. 내수면은 하천, 댐, 호수, 늪, 저수지와 그 밖의 인공적으로 조성된 담수(淡水)나 기수(바닷물과 민물이 섞인 물)의 물흐름 또는 수면(나무위키참조)을 총칭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1코스에 있는 오조항과 성산포항 사이에서 바다는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런 형태를 내수면이라고 한다. 이곳의 내수면은 조선 말기에 보를 쌓아 논으로 만들었으나, 실패하여 늪으로 변했다. 새마을 사업 때는 8만 평에 달하는 양식장을 조성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지금은 거의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실패의 흔적을 안고 있지만 흔적 위에 그려진 풍경은 아름답다. 수면에는 하얀 구름을 담은 파란 하늘이 잔잔히 그려져 울렁인다. 이 둑길이 조선 시대에 쌓은 보는 아니었을까? 내수면 곳곳에는 화산활동의 흔적인 ‘튜물러스’가 자리해 있다. ‘튜물러스’는 화산폭발로 흘러내린 용암류가 표면은 굳기 시작했지만 내부는 여전히 천천히 흐르면서, 그 압력이 위로 올라와 완만한 구릉형태를 이룬 것을 말한다. 수면 위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피부가 튼 것 같은 검은 암석의 작은 섬들이 있다. 이것이 ‘튜물러스’다.
<튜물러스>
오메가 모양의 머리엔 식산봉이 있다. 식산봉은 군량미를 쌓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구가 군량미와 함께 군사도 많다고 생각하여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식산봉 중간에 전망대가 있다.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초록의 나무들로 만들어진 액자를 두른 성산일출봉 사진 같았다. 정상에도 성산일출봉이 역시나 보였다. 어디서나 보인다. 성산일출봉의 어느 면이 보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일출봉의 왼쪽 면이면 종달리, 정면은 식산봉 또는 오조리, 오른쪽 면이면 광치기 해변 그리고 뒷면은 우도에 있는 것이다.
<식산봉/식산봉에서 본 성산일출봉>
식산봉을 내려오니 피곤이 확 몰려왔다. 특히 발바닥이 아팠다. 무릎은 뻣뻣해졌다.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식산봉 아래엔 나무테크로 만든 다리가 맞은편 오조리 마을까지 이어졌다. 마을로 들어가니 이곳이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식들이 보였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어디가 촬영지였는지 알지 못했다. 마을 길 중간에 빨간 의자가 놓여있다. 위엔 ‘좀 쉬영갑서예’라고 써진 나무 안내판이 있다. 그림자만 앉히고 바로 걸었다. 흙이 좋아서인가? 밭에는 배추 같기도 하고 양배추 같기도 한 것이 무척 크게 자라 있다. 마을 길을 벗어나니 다시 내수면 길이다. 내수면을 중심으로 한 올레길은 좀 특이하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세 코스의 올레길을 돌았지만 그곳에서 걸었던 모든 길이 내수면 올레에 있었다. 마을 길, 내수면 길이 대신한 해안 길, 오름(식산봉), 밭 길, 작은 숲길 여기에 제주가 화산활동으로 생긴 것임을 잘 보여주는 구릉인 ‘튜물러스’를 가로지르는 길 그리고 내수면에 새겨진 실패의 역 등. 어쩌면 내수면 올레길은 올레가 보여주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축약해서 풀어놓은 것 같았다. 이것을 다 돌고 나서 깨달았다. 좀 더 주의 깊게 보며 걸을걸. 아쉬움이 남았다.
<오조리 마을>
내수면 올레길 입구로 다시 왔을 때 말들이 줄지어 걷고 있고, 말 등에는 어린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이것도 관광상품이 되는구나. 걷는 게 무척 힘들었다. 다리를 질질 끌며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광치기 해변. 목화휴게소에서 봤던 여성팀이 간세 주변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지나칠까 하다 가봤다. 간세에 있는 스탬프를 못 찾고 있다고 했다. 알려주니 그녀들은 앱으로 QR 코드를 찍었다. QR코드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제 어디 가는지 물었다. 2코스를 조금 더 돌려한다고 했다. 나는 방금 2코스 초입을 돌았다고 말하며 지금은 안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거의 6시가 다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였다. 목화휴게소에서 나보다 먼저 출발해서 지금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다면 아주 느긋하게 걸었다는 의미이다. 내수면 올레길은 한번 가면 도중에 끊을 수가 없다. 아마 해가 지고도 계속 걸어야 할지 모른다.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걷겠다 하기에 행운을 빈다고 하며 헤어졌다.
<성산 프릳츠/업체사진 참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까 봐둔 카페에 갔다. 간판을 보고 놀랐다. 카페 이름 때문이었다. ‘프릳츠’. 서울 공덕동에 있는 유명한 카페다. 허영만의 ‘커피 한잔 할까요’에 소개된 카페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니 반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공덕동에 있는 ‘프릳츠’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여기도 이런 콘셉트를 이어갔나 보다. 붉은 벽돌에 파란 기와지붕. 외관은 시골 마을회관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주변과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세련되지 않아서 좋았다. 낯선 건, 여기에 ‘프릳츠’가 있다는 그 자체다. ‘프릳츠’는 커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프릳츠’는 커피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공간도 의미한다. 커피와 공간이 어우러져 어떤 고유함이 ‘프릳츠’에 배어 있다. 그 고유함을 프릳츠만의 감성으로 부를 수 있다. 커피 맛은 공덕동의 맛과 같을지 모르지만 공간은 아니다. 내부는 무척 세련되어 있다. 요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내부 풍경이다. 이건 ‘프릳츠’의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는 내내 ‘프릳츠’만의 감성을 느낄 수 없었다. 다른 ‘프릳츠’였다. 리브레, 커피한약방 등 내가 아끼는 카페들도 ‘프릳츠’를 닮아가고 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싫다. 이런 분점들은 다들 내부가 이상하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롱블랙과 토마토가 들어간 빵 하나로 다른 '프릳츠'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성산일출봉 야경 / 내수면 야경>
<게스트하우스 휴게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침대 누웠다. 아무도 없다. 오늘이 제주의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아쉽다. 나가보았다. 성산일출봉으로 달이 뜨고 고기잡이 배들의 등불이 보인다. 내수면으로 갔다. 오조리와 성산을 잇는 한도교 그리고 식산봉 둘레 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내수면에 드리웠다. 야경이 예뻤다. 낮과 다른 얼굴의 내수면을 한참보다 숙소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의 여주인이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술기운이 있는 새로운 룸메트 2명, 이탈리아 여성 1명, 싱가포르 가족 등이 이야기 사이사이 휴게실을 왔다 갔다 했다. 올레의 둘째 날이 이야기 속에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진공은 없었다. (2024.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