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회사에서 온라인 교육 상품을 기획하는 일을 몇 년째 하고 있지만, 아직도 첫 기획 미팅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획 미팅은 일주일에 한 번씩 기획자들이 모여서 신규 아이템에 대한 아이디에이션 내용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추가 리소스 투입 여부를 결정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대표님이 유일하게 참석하시는 실무 미팅이기도 했다. 필자는 입사한지 6일 만에 이 미팅에 투입됐다.
필자는 기획 회의에 대한 무지와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2개월 먼저 입사한 동료가 필자에게 차분하게 잘 알려준 덕분에 첫 미팅 준비를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준비한 건 다 보여주고 나와야겠다는 일념으로 첫 미팅에 들어갔고,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필자는 누가 칼 들고 뒤에서 쫓아오면서 말 안 하면 잡아먹는다고 했는지 준비한 말, 안 한 말, 필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꺼내며 두서없이 뱉어대다가 중간에 커트 당했다. 대표님은 최악의 브리핑을 듣고도 필자의 기획 의도를 파악하셨고 이런저런 피드백과 질문을 해주셨다. 그중에 딱 한 마디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 상품의 고객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나요?
이 한 마디는 기획자가 고객 관점의 사고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질문이고, 기획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를 기획자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문장이다. 이 문장의 포인트는 2가지다. 첫 번째는 문장의 주어가 상품이 아니라 '고객'이라는 것. 두 번째는 '고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보통 무언가를 기획할 때 기획자의 관점 또는 아이디어(제품, 서비스, 콘텐츠 등) 관점으로 사고를 시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획자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문제를 고객 관점으로 사고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네가 고객이라고 생각해 봐'라는 만능 조언도 있지만, 필자는 내가 내 상품의 공급자가 된 순간부터 내 상품의 고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고객 관점으로 문제를 보고 사고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일을 하면서 고객의 의중을 칭할 때 니즈(needs)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근데 필자에게 니즈라는 단어는 포괄적이고 동기의 수준이 낮은 단어로 느껴진다. 마치 끝이 뭉툭한 연필처럼 스케치는 할 수 있지만 디테일을 그리기 어려웠다. 대신, 니즈가 들어갈 자리에 고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고객에 대한 생각을 뾰족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끝이 뾰족한 연필로 디테일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의 뇌피셜에 권위를 끼얹어보자면, 린 고객 개발의 저자 신디 앨버레즈도 생각의 관점을 제품에서 고객으로 바꾸기 위해(정확히는 고객이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로 바꾸기 위해) 평소와 다른 단어를 쓴다고 했다. "왜 밀크셰이크를 구매하셨나요?"가 아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밀크셰이크를 고용하셨나요?"라고.
아무리 고객 관점으로 사고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기획 초보인 필자가 바로 한 큐에 고객의 고통까지 정의할 수 없었다. 고객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깊게,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줄 도구가 필요했고, 필자가 기획 일을 계속하면서 나만의 4단계 질문을 만들었다. <고객의 고통을 찾는 여정>이라고 이름도 붙였다. 필자는 기획할 때 이 질문들에 스스로 답변을 하면서 생각을 단계별로 정리할 수 있었고 고객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고객의 고통을 찾는 여정
1. 고객의 솔직한 욕구는 무엇인가?
2. 고객의 목표는 무엇인가?
3. 고객이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
4. 고객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오늘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가?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면, 솔직한 욕구는 복잡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배부르게 먹고 싶다', '놀고 싶다', '돈 많이 벌고 싶다', '잘 살고 싶다'와 같이 단순할 가능성이 크다. 보통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에서 1, 2단계에 해당하는 욕구(신체적 욕구, 안전의 욕구)일 것이다. 기획자는 내 상품의 고객이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은 솔직한 욕구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길 것이다. 기획자는 고객의 목표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구체적일수록 좋다. 퇴근길에 배부르게 먹고 싶은 욕구 때문에 '퇴근길에 붕어빵을 사 먹겠다'라는 목표보다 '퇴근길에 팥붕을 사 먹겠다'라는 목표가 구체적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방금 구운 팥붕을 사서 꼬리부터 먹겠다'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고객의 목표를 이해한다면, 기획자는 고객의 문제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은 우리의 고객이 아니다. 우리의 고객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고, 돈을 지불해서 본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문제의 종류는 다양하다.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돼서 귀찮을 수 있고, 기존에 사용하던 게 불편하거나 유행이 지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기획자는 고객의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여러 문제들 중에 고객이 오늘 맞닥뜨린 문제 때문에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찾고 정의하면 된다. 높은 확률로 고객이 오늘 겪고 있는 문제가 여러 문제들 중에 가장 큰 문제일 것이고 고객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기획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오늘의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