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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pr 17. 2017

韓, 中, 日 중 참견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참견의 문화심리학

정답은 한국입니다! 

... 뭔가 싱거우셨죠? 문제 나가자마자 답이 나오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 중에서 한국 사람들이 참견이 가장 심하죠. 근거가 뭐냐구요? 지금부터 살펴보시죠^^.


한중일 세 나라는 서로 많이 닮았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한자 문화권이며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집단주의 문화라는 것도 같습니다. 실제로 주류 심리학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을 굳이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냥 동양 집단주의 문화로 묶어서 이해하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가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실 겁니다. 한국, 중국, 일본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경험적 자료들이 존재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학술적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못할 뿐이죠. 오늘은 학술적 차원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오지랖의 한국인, 비에관시엔스의 중국인, 메이와쿠의 일본인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는 제 이전 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56)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사회적 맥락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미치기 바라는 주체성 자기가 우세하며, 일본인은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영향력을 수용하려는 대상성 자기가 우세하다는 것이죠.


자기관의 차이는 문화의 양상으로 이어집니다. 자기관이란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주체성 자기가 우세한 한국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미치고 확인받으려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한국의 '오지랖'입니다. 오지랖이란 윗옷의 앞자락을 뜻하는 말로, 오지랖이 넓다는 뜻은 남의 일에 지나치게 참견한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죠. 한국인들의 대인관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오지랖'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부는 잘 되고? 원서 어디 넣었니? 결혼은 언제 할거야? 명절 때마다 미혼 취준생들을 괴롭히는 친척들의 오지랖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누가 무슨 옷을 입는지, 누구랑 밥을 먹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 연봉은 얼만지, 애들 학원은 몇 개 보내는지 등등 인터넷에는 주변인들의 오지랖으로 괴로워하는 사례들이 넘쳐납니다.


일본은 어떨까요? 

대상성 자기가 우세한 일본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보다는 타인의 영향력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춥니다. 일본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메이와쿠(迷惑, めいわく)라고 하지요.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은 폐가 될까봐 다른 이들의 일에 참견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의 대인관계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가 있어 풀어볼까 합니다. 일본인과 결혼하여 일본에 20년 이상 거주하신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편의상 A씨라고 합시다.


일본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A씨는 친절한 이웃집 아주머니와 친해졌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타국에 시집온 A씨는 곧 이웃집 아주머니를 친정 어머니만큼이나 따르게 되었다는데요. 둘은 서로의 집에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함께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함께 한 시간 만큼이나 친분도 깊어졌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A씨는 장을 봐 오던 중에 이웃집 아주머니 댁에 들렀습니다. 곁눈으로 A씨가 사온 물건들을 살피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A씨는 집에 돌아와서야 이웃집 아주머니가 머뭇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요.


A씨가 음식 재료를 잘못 사 온 것이었습니다. 재료를 보고 새댁이 무슨 요리를 할 지 짐작한 이웃집 아주머니는 A씨가 잘못된 재료를 골랐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A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결국 입을 열지 않은 것이죠. A씨는 자신이 '친정 엄마'처럼 믿고 따르든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런 얘기마저 해주지 않았다는 것에 섭섭함과 배신감마저 느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한국과 일본의 전형적 대인관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고 네 마음이 내 마음 같아서 서로간의 거리가 없는 한국과, 혹시나도 상대에게 폐가 될까봐 서로의 거리를 최대한 유지하는 일본입니다. 결론적으로 일본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어떨까요? 워낙에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서 중국인은 어떻다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중국인들의 문화적 행동유형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가장 띄는 중국인들의 행동양식은 바로 '중국인들은 누구의 눈치도 안 본다'는 것이죠. 


쉬운 예로, 거리에서 떡진 머리에 아무 옷이나 걸쳐입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동양인이 있다면 그는 높은 확률로 중국인일 겁니다. (중국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패션에 절대적 기준이란 없으니까요.) 이런 태도는 중국의 비에관시엔스(別管閑事)라는 가치와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비에관시엔스는 말 그대로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륙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세력들이 일어나고 저물어 간 까닭일까요? 함부로 남의 편에 서다가 잘못되는 사례를 많이 경험했던 탓인지 중국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는 습관이 뿌리 깊습니다. 

누가 쓰러져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본 체 지나간다는 중국의 거리나 다른 나라의 공공장소에서 무질서한 행동을 일삼는 (일부) 중국 관광객들의 행동은 바로 이 비에관시엔스에서 비롯된 행동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자기관은 '자율성 자기'로 설명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외부로 미치려는 주체성 자기나 다른 이들의 영향력을 수용하려는 대상성 자기와는 달리 자율성 자기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는 별개로 자신의 목표와 욕구에 충실한 것이죠. 자율성 자기가 우세한 이들은 굳이 다른 이들의 일에 참견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율성 자기

많지는 않지만 여러 번의 연구에서 한국의 주체성 자기, 일본의 대상성 자기, 중국의 자율성 자기 우세는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주류 이론(개인주의 vs 집단주의)이 아니라서 찾아 보시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죠;  다시 오늘의 주제인 참견으로 돌아와서...


결론적으로, 한국인들은 남의 일에 참견을 잘 합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참견을, 오지랖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대인관계 압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나는 요즘은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집니다. 


별 걸 다 참견하는 한국문화에 비해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는 일본문화가 더 좋아보이고, 남이야 어쨌든 제 갈 길 가는 중국문화도 쿨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문화를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문화를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제가 1년 넘게 드려 오고 있지 않습니까.


참견은 첫째로 관심에서 시작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에관시엔스의 중국인들처럼 말이죠. 다음으로 참견은 공감에서 비롯됩니다. 엄연한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면 다른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이와쿠의 일본인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것을 한국인들은 합니다. 남의 일이지만 참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유난히 '지하철 의인'들이 많은 이유도, 많은 시민들이 거리의 폭행이나 범법행위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도, 내 이익보다는 저 사람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참견은 상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상황에서 상대의 감정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참견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한 참견도 있습니다. 도움이나 조언을 원하지 않는 경우라든지, 상대가 지위나 나이를 근거로 부당한 참견을 하는 경우들입니다. 대인관계의 질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요즘 세상에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지나친 참견은 당연히 지양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참견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사회일까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전통적 공통체가 붕괴하고 가족이 파편화될수록 서로를 보듬고 다 같이 살아갈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내 이익과 상관없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못본 체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여러 해 동안,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세상에는 내 이익보다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참견은 세상을 바꿉니다. 누구보다 참견을 잘 하는 한국인들은 누구보다 빨리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잠재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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