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정(情), 일본인의 아마에(甘え)
아마에(甘え)는 가장 일본적인 정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情)이 가장 한국적인 정서인 것처럼 말이죠. 한선생은 지난 글에서 정이 가장 한국적인 정서인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마에는 왜 가장 일본적인 정서일까요?
아마에(甘え)는 우리말로 '응석'이나 '어리광' 쯤으로 옮겨집니다. 우리도 비슷한 개념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情)에 해당하는 일본어 또한 존재합니다. 닌조오(人情) 혹은 오모이야리(思いやり)가 그것인데요.
그러나 사람들은 응석이나 어리광이 가장 한국적인 정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닌조오나 오모이야리가 가장 일본적인 정서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도 없죠. 오늘은 일본의 아마에(甘え)라는 정서가 가장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1971년 도이 다케오(土居 健郞)는 '아마에의 구조'라는 책에서 일본인들의 아마에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아마에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마음. 이것이 아마에입니다.
이런 속성 때문에 도이 다케오는 아마에를 수동적 대상애(對象愛)라고 정의하는데요. 여기가 아마에(甘え)가 한국인의 정(情)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지난 글(정(情)이란 무엇인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08)에서 정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중심성, 즉 주관성이라 말씀드렸었지요. 정은 상대방에 대해 내가 갖는 감정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친밀감과 애정을 느끼고 내가 느낀만큼 상대방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정이죠.
아마에처럼 정도 어머니와 자녀 관계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아이는 조건없이 제공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죠. 일본의 아마에가 아이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한국의 정은 어머니 입장의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조건없는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죠. 이는 실제로 어린 아이들의 자의식이 발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이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는 아이의 감정경험을 내면화했다면 한국인들은 어머니의 감정경험을 내면화한 것입니다.
즉, 한국인의 정(情)은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느끼는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능동적 주체애(主體愛)인 것이죠. 수동적 대상애로 정의되는 아마에와는 그 방향이 정 반대입니다. 정과 아마에의 이러한 속성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자기관에 근거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누미야 요시유키 박사의 주체성-대상성 자기이론에 따르면 한국인은 주체성 자기, 일본인은 대상성 자기가 우세한 사람들인데요. 이 자기관의 성격에 따라 개인의 경험은 그 방향을 달리하게 됩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제 지난 글(한국인과 일본인의 심리적 차이ttps://brunch.co.kr/@onestepculture/156)과 이누미야 박사의 책(아래)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낀 애정을 상대에게 베풀고자 하는 정(情)에는 자신을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는 주체성 자기의 특성이, 상대방이 자신에게 주는 애정을 받으려는 아마에(甘え)에는 자신을 사회적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대상적 존재로 인식하는 대상성 자기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심리적 특성에 근거한 정과 아마에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렸구요. 다음은 아마에가 과연 일본문화와 일본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이 다케오는 아마에(甘え)가 일본인의 전반적인 인간관계와 일반적 경험으로 확장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아마에를 '인간 존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리의 상황을 부정하고 분리가 가져올 고통을 잊으려는 마음인 동시에, 분리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닥칠 갈등과 불안을 숨기려는 심리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분리란 어떤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도이 다케오의 설명을 정신역동이론의 관점으로 이해하자면, 아마에는 일본인들이 분리불안에 대처하기 위한 문화적 방어기제이자 그 감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분리불안은 어린아이들이 어머니에게서 떨어졌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즉, 일본인들은 자신의 존재가 불안하다고 느낄 때,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았을 때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찾아가려 한다는 것이죠.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에 아마에의 이러한 특징을 알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일본인들의 '좀 어떻게...' 화법을 예로 들고 있는데요. 일본인들이 절대 위기에 빠졌을 때 마지막으로 기대는 말이 '좀 어떻게 안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참고 인내하며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쓰는 이 표현이, 일본인들의 아마에에 기원을 둔다는 것이죠. 외롭고 힘들 때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든지 기대고 싶은 마음이 바로 아마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아마에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일본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메이와쿠(迷惑)를 꼽을 수 있는데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지하철이 유난히 조용한 이유도, 일본의 거리가 유난히 깨끗한 이유도 이 메이와쿠 때문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질서의식' 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 메이와쿠는 상상 이상으로 일본인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아마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마에는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마에조차 남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인들은 좀처럼 아마에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또 그래서은 안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2013년 방영된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일본 드라마를 번안한 것인데요. 여기에 일본의 아마에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초등학교부터 힘겨운 입시지옥에 시달리던 학생이 선생님께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아래와 같이 쏘아붙입니다.
여기서의 어리광은 아마에의 번역입니다. 사회는 성적으로 너희들을 평가하고 성적이 좋아야 성공할 수 있으니 공부가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것은 철없는 행동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어려도,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어리광(아마에)은 부려서는 안된다는 문화적 인식이 드러나는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일본의 연인들이 며칠씩, 때로는 몇 주씩 연락을 하지 않고도 괜찮을 수 있는 이유도 필요이상의 잦은(?) 전화가 연인에게 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일본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부조차도 각자의 영역이 확실합니다. 물론 일심동체라 하는 부부일지라도 서로의 독립성이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힘들 때 기대는 것조차 꺼려진다면 그것을 과연 부부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것도 한국문화적인 생각이겠지만 말이죠.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아마에란 매우 간절하지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음, 어쩌면 표현해서는 안되는 마음입니다. 힘들고 외롭다고 아마에를 드러냈다가는 '폐를 끼치는 인간' 또는 '자립하지 못한 인간'이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것이 가족일지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아마에의 이중성은 일본인들의 마음에 매우 취약한 부분을 만들어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