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Apr 11. 2018

아파트의 품격

우리에게 집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집은 살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나무 밑이나 바위 틈, 동굴 속에서 비바람과 맹수들을 피하던 인류는 집을 짓고 살면서 비로소 안정감을 얻었습니다. 네 개의 벽과 지붕이 주는 안정 아래서 사람들은 하루의 피로를 풀고 가족들과 정을 나누며 내일의 희망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집에 사고 판다는 의미가 붙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든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고 쉽게 떠나는 곳에서 집은 사고 파는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때그때 집을 지을 만한 땅도, 자재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집을 지어 파는 사람, 집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사람도 나타났고, 집의 가치도 수요와 공급에 따라 오르고 내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집을 구하는 사람이 많으면 집값은 오르고 찾는 사람이 없으면 떨어지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집값은 이런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잘 들어맞지 않는 듯합니다.


제가 부동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긴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주택 시장에서 그 정도 가격에 구매력이 있는 수요층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값은 내려올 줄 모르고 있는데요. 일부 부동산 사이트에서는 우리나라의 집값이 아직 저평가되어 있다는 분석도 있던데 지금보다 집값이 더 오르면 과연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집의 의미는 재산 그 이상입니다.  6.25 전쟁 후,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이들은 곳곳에 대규모 피란민 촌을 만들었고, 70년대 개발시대에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집이란 지친 몸을 눕히고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부산의 피난민촌

전쟁, 취업 등 여러 이유로 정든 고향, 살던 집을 떠나 온 우리네 부모님들은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빨리 공급할 수 있는 규격화된 근대식 거주 모델이 필요했고 이에 도입된 것이 아파트였습니다. ‘주택건설 2백만 호!!’ 군인 출신이었던 그 분의 성향답게 아파트는 마치 군사작전처럼 우리나라의 모습을 바꿔 나갔죠.      


국가 주도의 아파트 건설은 우리의 삶과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럽 등지에서는 하층민들이나 사는 공동주택을 뜻하는 아파트는, 한국에서 근대화 및 도시화의 상징이 되었고 아파트 단지에서의 생활은 표준화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것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종암아파트

그렇게 집을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이 비로소 세상의 기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집(아파트)이 부의 증대 수단이 된 것은 그보다 조금 후의 일입니다. 80년대 후반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분양되기 시작하면서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투기꾼을 포함, 집을 사고 팔아 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교육 열풍과 맞물리면서 몇몇 지역(예, 8학군)의 아파트 단지가 브랜드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죠. 집값은 점점 올랐고 집값을 더 올리기 위한 건설사와 입주민들의 노력도 가중되었습니다. 모든 아파트 단지들의 이름에는 명품임을 드러내는 수식어가 붙었고 사람들은 아파트의 품위를 위해 베란다에 빨래 너는 것도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집은 내가 이루어낸 결실을 넘어 나의 계층과 신분을 상징하는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아파트의 품격을 위해 옆 동네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택배 차량의 출입을 막는 사람들의 존재는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가 내가 어떤 사람임을 결정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입니다.


집에는 한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어 버린 집은 어느새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집값 몇 푼 올리기 위해 이웃들에게 자행되는 일들로 피폐해져 가는 사회 분위기는 오히려 부차적인 일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집값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의 부모들은 알고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집은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재산을 증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 도적들을 영웅시하며 오랫동안 부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키워왔던 한국인들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09),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부의 달콤함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더구나 최근 몇 년간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며 집은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최후의 희망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 세운 품격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자식들의 미래를 담보로 얻어낸 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