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제도의 역사로 본 국민청원의 문화심리
새 정부 들어 국민청원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국민들이 해결을 원하는 사안을 정부에 직접 청원할 수 있는 제도인데요. 국민청원 사이트를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할 만큼 현 정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합니다.
이 제도가 생긴 후로, '조두순 출소 반대', '소년법 개정', '낙태죄 폐지'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청원의 대상이 되었고 청와대는 국민의 목소리에 성실히 응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네이버 수사'나 '일간베스트 폐지' 등이 20만 명을 넘었고, 평창올림픽 여자 팀추월 경기로 촉발된 '김보름, 박지우 선수의 자격 박탈 및 빙상연맹 처벌' 청원은 역사상 최대 인원인 50만 명을 넘어 60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민청원 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데요. 청와대의 업무 과중에 대한 걱정에서부터 누군가 마녀사냥을 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경계의 목소리,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수의 대중이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주장까지도 나오는 실정입니다.
사실 국민청원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올라온 청원들 중에는 대통령이나 정부의 능력 밖에 있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루에 올라오는 청원의 수는 1000건이 넘습니다. 과연 한국인들은 국민청원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사실 국민청원의 역사는 깁니다. 국민청원이라는 제도의 골자는 국민 누구나 정부에게 어떠한 사안을 해결해 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다는 건데요.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신문고지요.
신문고(申聞鼓)는 조선 태종 1년(1401년) 처음 설치됩니다. 백성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직접 임금에게 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문고를 쳐 접수된 사안은 5일 이내에 응답하도록 했는데요. 기한을 넘기면 사유서를 써야 할만큼 백성들의 억울함을 신속하게 처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고는 세조와 연산군 등에 의해 금지되기도 하였으나 번번이 되살아나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다했습니다. 현재도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과 더불어 '국민신문고' 사이트가 있습니다. 청와대 뿐만 아니라 여러 지자체나 기업들도 신문고라는 이름의 소통창구를 운영하고 있죠.
조선시대에는 신문고 외에도 백성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격쟁(擊錚)입니다. 격쟁이란 '징(혹은 꽹과리)을 친다'는 뜻인데요. 왕의 행차할 때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행차를 멈춰세우고 자신의 사연을 왕께 직접 고하는 제도입니다.
관청 앞마당(의금부)에 설치되어 치러 들어가기가 꺼려질 뿐더러 치고 나서도 그 사연이 임금께 직접 전달되었는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신문고와는 달리, 격쟁은 임금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었기에 신문고보다 훨씬 적극적인 문제해결방식이었습니다.
왕조시대에 왕이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 왕이 지나가는데 꽹과리를 쳐대며 행차를 세운다. 왕은 그를 가까이 오게 하여 사연을 직접 듣고 해결해준다. 이렇게 글로 풀어놓으니 이게 보통 제도가 아니라는 느낌이 오시죠? 격쟁은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정조대왕이 많이 활용했던 백성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였습니다.
선비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선비들은 누구나 왕께 상소를 올릴 수 있었는데요. 상소의 내용은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부터 정책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 등 지식인들이 국가에 제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상소를 읽는 것이었고 각지에서 올라온 상소가 겁나 많았기에 조선의 왕들은 늘 과로에 시달렸다고 하죠.
상소 중에 끝판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만인소(萬人疏)입니다. 상소의 말미에 그 상소의 내용에 동의하는, 무려 1만 명의 서명이 포함된 것이죠. 20만 명이 넘으면 응답 기준을 충족하는 현대 국민청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구가 1500만 명 정도이던 조선 후기, 만 명의 서명을 받으려면 얼만큼의 노력이 필요했을까요?
이렇듯, 국민청원은 하루아침에 갑툭튀한 제도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민청원과 비슷한 제도들이 계속해서 존재해 왔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제도들이 결국 백성들이 억울함을 느끼는 상황의 실질적인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며 명목상의 제도(쇼통?)에 불과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문화에는 현시적 기능과 잠재적 기능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현시적 기능만 보는 것은 어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어떤 문화의 현시적 결과가 별 것 없다고 그 문화가 필요없거나 역기능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죠.
신문고, 격쟁, 상소 등의 제도가 지속해 왔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권력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욕구가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왕의 말이 곧 법인 왕조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임금들은 백성들의 소통 요구에 응답해 왔다는 것이죠.
국민이 제 목소리를 내고, 국가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예로부터 이어진 신문고, 격쟁 등의 잠재적 기능이자 국민청원의 핵심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 1조 2항)'는 헌법정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죠.
쏟아지는 국민청원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때까지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가로막은 권위주의 정부들의 행태야 말로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임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문화심리학에서 보고 있는 한국인들은 매우 자기가치감이 높고 자신의 영향력을 외부로 표출하고자 하는 주체성 자기가 강합니다(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56). 이러한 특징은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 설정에 영향을 미치고(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22) 또한 다른 이들과의 공감과 소통 욕구에 영향을 미치죠.
한국인들이 높은 수준의 공감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다음에는 한국인의 공감을 주제로 '떼창' 문화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