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현시적 기능과 잠재적 기능
어느덧 명절은 온갖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불편한 날이 되었습니다. 재산싸움같은 고전적인 주제로 시작하여 친척들의 잔소리, 조카들의 난장질(?)에 이은 시댁, 처가와의 갈등, 성평등에 대한 이슈, 호칭문제 등 해가 갈수록 레퍼토리가 하나씩 늘어가는 느낌입니다.
쉬는 날이라 좋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치러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어쨌거나 불편한 날이라는 건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급기야는 명절을 없애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는데요. 도대체 명절은 왜 지내는 것일까요?
명절은 농경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표적 명절인 추석과 정월대보름의 시기는 추수 직후와 입춘 즈음입니다. 추석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농사짓느라 고생했으니 추수한 농작물로 풍족하게 먹고 놀고 쉬자는 것이고, 정월대보름은 본격적으로 농사 짓기 전에 한번 땡기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날입니다.
현대사회가 되면서 농경문화적 전통은 의미를 잃었고 현재는 추석과 설날 정도만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단오, 유두, 백중 등등 다른 명절들은 일상에서 점차 잊혀져 가지만 추석과 설날은 아직 남아 있는 이유는 이 날 '차례', 즉 제사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조선 500년 동안 유교가 국시였고 특히 효를 강조한 우리나라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강조했는데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간 시묘살이를 해야 하는 것부터 매해 돌아가신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을 4대조 조상까지 했습니다(4대 봉사). 5대조 이상의 조상부터는 설날과 추석때만 합동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차례라고 합니다.
해서 다른 명절들을 거의 지내지 않게 된 지금도 설날과 추석은 남아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 명절의 주된 기능은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명절 갈등의 큰 이슈가 발생합니다. 제사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은 명절날 봐야 하는 명언..이라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아래 글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원글은 어느 포털 댓글로 추정되는데 트위터로 리트윗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 제사의 기능을 '조상 덕 보려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요. 제사 지내봐야 조상 덕 볼 일 없으니 제사 지내는 건 쓸 데 없는 짓이라는 얘깁니다.
제사와 조상 덕의 관계가 없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하여 본인의 지식을 뽐내는 한편 명절문화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분을 최대한 살린 이 글은,
대단히 무식한 글입니다.
저는 문화심리학자로서의 제 소명을, 여러분들이 이런 무식한 글에 좋아요 누르고 다니시지 않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글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든 문화에는 기능이 있습니다. 문화의 기능은 '현시적 기능'과 '잠재적 기능'으로 나뉘는데요. 현시적 기능이란 겉으로 척 봐도 '아 이 문화는 이거 때문에 생겼구나'라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기능이고, 잠재적 기능은 그 문화가 사회의 유지와 구성원들의 생존을 위해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기우제의 현시적 기능은 비를 내리는 것이고, 잠재적 기능은 가뭄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내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문화의 잠재적 기능보다는 현시적 기능만을 기억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문화는 구성원들의 생존과 사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집니다. 그 문화가 지속되어야 후속 세대들이 계속해서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선대의 사람들은 첫째, 후속 세대를 교육시켜야 하구요.
후손들이 선조의 가르침을 더 잘 지키도록 그 문화와관련된 여러가지 가치관들을 덧붙여 갑니다. ~을 잘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을 안 하면 천벌을 받는다 등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또 나쁜 일을 피하기 위해서 그 풍습을 더 잘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감을 잡으셨겠지만, 제사를 지내면 조상 덕을 본다는 것은 제사의 현시적 기능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제사의 잠재적 기능, 즉 후손들이 더 잘 살아가게끔 가르치기 위해서 제사를 잘 지내면 복을 받는다.. 같은 가치관을 덧붙여 온 것이죠.
그렇다면 제사의 잠재적 기능은 무엇일까요?
잠재적 기능이란 사회유지와 구성원들의 생존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제사를 잘 지낼수록 사회가 튼튼하고 살아남을 확률이 커질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농사'입니다.
농업혁명이 시작된 후로 농사는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기본 산업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처럼 상공업을 경시한 나라에서 농사는 말 그대로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일 수밖에 없죠. 농사를 열심히 지어야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고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고 결국 사회가 유지되는 시스템입니다.
국가는 당연히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유민을 막기 위한 각종 정책들도 펼쳤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정적인 시스템이 구축되려면 구성원 스스로가 이를 내면화시켜야 합니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야 한다는 것을 내면화시킬 수 있는 가치관은 바로 효(孝)입니다.
효의 실천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상을 잘 모시는 것, 다시 말해 제사를 잘 지내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맛있는 것을 올려드리고 잠자리를 보아드리려면, 4대 조상님들의 기일을 일일이 지켜 제사를 지내려면 사는 동네를 떠날 수 없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을 동네는 돌아가신 조상들이 묻혀 계신 곳이고 내 부모가 살아계신 곳이며, 내가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입니다. 효를 실천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논밭을 떠날 생각 없이 농사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효의, 그리고 제사의 잠재적 기능입니다.
조선이 충, 효, 예 중에 효를 가장 강조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전국에 효와 관련한 수많은 전설과 미담, 효자비들이 전해내려옵니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효를 실천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우리가 지금, 명절에 대한 오만가지 불만을 쏟아내는 이유는 명절의 잠재적 기능이 우리의 삶과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농경민족이 아니기 때문이죠. 장유유서와 같은 전통적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른 문화의 변화는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 편하게 명절을 없앨 수 있을까요? 그러기엔 아직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대의 명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한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더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가 되면서 명절의 의미가 바뀝니다. 농사를 짓는 시대가 아니니 당연하겠지요.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농촌에는 어느덧 부모 세대만 남았습니다. 농사의 호흡을 조절했던 명절은 이제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사라진 공동체, 흩어진 가족, 지치고 외롭고 고달픈 삶 속에서..
명절은 우리가 '가족'임을 확인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도시로 나온 자식들은 부모님이 평소에 접하기 힘든 물건들로 구성된 선물세트를 사들고 고향으로 향하고, 부모님들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김치, 참기름 등 평소에 못 먹인 음식들을 싸 보냅니다. '민족대이동'의 시작이자 '스팸 선물세트'나 '음식 보따리' 등 새로운 명절풍경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고향을 떠났던 이들은 이제 새로운 고향에서 자식들을 낳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변화를 겪어 온 한국이니만큼 삶의 모습들도 그만큼 빨리 변해가고 있죠. 비혼인구 및 1인 가구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잘게 쪼개져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이라지만 가족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명절, 이제 없어져도 좋은 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