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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May 31. 2019

드립의 민족

풍자와 해학의 심리학적 기제 및 기능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을 풍자와 해학의 민족이라 합니다. 문학과 예술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전반에 풍자와 해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표지 사진은 잘 알려진 민화 '까치 호랑이'입니다. 얼빵한 표정의 호랑이와 놀리는 듯한 까치의 시선이 해학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그림이죠.


풍자는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나 인간의 모순을 비웃는 표현방식입니다. 풍자의 심리적 기능은 공격입니다. 내게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는 없으니 말 그대로 '돌려 까는' 것이죠. 반면 해학은 화나고 슬프고 안타까운 장면을 웃음으로 승화시킵니다. 상황 자체를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풍자의 한마당 탈춤

계급적 질서가 지배하던 과거, 분하고 화나는 일을 당한 민초들이 억울함을 해소할 방법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화나고 억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는 없죠. 풍자와 해학은 부정적 감정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어 줍니다. 다시 말해, 풍자와 해학은

일상의 부정적 경험에 대처하는 우리 민족의 방어기제였던 것입니다.


풍자와 해학은, 그러나 현실에 대한 순응과는 거리가 멉니다. 풍자와 해학에는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주는 기능 외에도 저항의지의 표출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부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삐딱하고 날카로운 정신이죠.


일제감점기 창씨개명에 대응하는 우리 조상님들의 개명 사례들을 보면, 犬糞食衛(이누쿠소 쿠라에-개똥이나 처먹어라), 昭和 亡太郞(쇼와 보타로-쇼와 망해라), 玄田牛一(쿠로다 규이치, 畜生칙쇼..의 파자), 田農炳夏(덴노헤이카-천황폐하와 동음) 등 서슬퍼런 일제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한편, 풍자와 해학의 기본 원리는 파격, 즉 격식(형식)의 파괴인데요. 익숙한 상황을 깨고 맥락을 비틀어 웃음과 재미를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진도 지역에서 불려지던 '거꾸로 아리랑'에서 파격의 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아리랑이란 일제가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자 가사를 거꾸로 해서 불렀다는 노래입니다.


판대본일 리바각딸 의놈왜 들끼새

(일본대판 딸각바리 왜놈의 새끼들)

을칼총 고다찼 라마 을랑자

(총칼을 찼다고 자랑을 마라)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신순이 이선북거 면가떠 실둥두

(이순신 거북선이 두둥실 떠가면)

은남다죽 들끼새자종 라리하 을살몰

(죽다남은 종자새끼들 몰살을 하리라)                                    


이렇듯, 한국인들은 역사 속에서 풍자와 해학을 통해 억압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이를 웃음으로 승화하며 긍정적으로, 때로는 패기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인터넷 시대가 열린 후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각종 패러디와 드립이 넘치고 있는데요. 단순히 재미로 하는 것들도 많지만 역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풍자형 패러디는 단연 한국 인터넷 문화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방송에도 나온 그 분 패러디
메르스 사태 당시 낙타 페이스북

2016년 전국을 뒤덮었던 탄핵 촛불집회에는 각양각색의 패러디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뒤덮었습니다. 엄숙하기만 할 것 같은 시위 현장에 나타난 기상천외한 각종 단체의 깃발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분노했지만 화만 내지 않았습니다. 좌절과 분노는 풍자와 해학의 옷을 입고 성숙하게 표출되었고 자칫 폭력을 부를 수 있었던 부정적 에너지는 긍정적 에너지로 화해 탄핵에 이어 세계가 높이 평가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죠.

이런 재기 넘치는 깃발들과 함께 2016년의 광장은 공연과 떼창, 토론과 음식이 어우러진 신명나는 한마당이었습니다. 언제 따로 말씀드리겠지만 파격은 신명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신명은 한국인들의 문화적 행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지금도 한국의 온-오프라인에는 오만가지 패러디와 드립이 넘치고 있습니다. 풍자와 해학의 민족을 잇는 '드립의 민족'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말장난이든 세태를 꼬집는 풍자든 간에 우리가 드립을 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배달의 민족 드립 백일장 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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