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신뢰와 사적 신뢰의 차이
2012년 OECD에서 실시한 행복지수 연구 중, 힘든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항목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36개국 중 35위를 차지했습니다. 차지했다는 말이 주는 어감이 무색할 정도로 낮은 순위입니다. 그랬군요. 힘들 때 도움받을 사람 하나가 없어서 우리가 불행했던 것이군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딱입니다.
과연 그렇겠다 싶은 것이 대한민국은 사기범죄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2013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사기범죄는 274,086건이 발생했습니다. 연평균 25만 건, 하루 60건 이상의 빈도입니다. 같은 기간 일본은 38,302건에 불과합니다. 역시 일본인들은 정직하군요. 과연 선진국 답습니다.
2018. 3. 통계청이 발표한 『2017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2017년 우리 국민의 가족, 이웃, 지인 등 일반인에 대한 신뢰는 4점 만점에 2.7점으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닙니다. 4점 만점이면 1-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2-신뢰하지 않는다, 3-신뢰하는 편이다, 4-전적으로 신뢰한다, 와 같은 식으로 측정했을텐데, 2.7점이면 신뢰할지 말지 망설이는 수준에 해당합니다.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는 더 가관입니다. 의료기관이 2.6점으로 상대적으로 가장 높고, 다음으로는 교육계, 금융기관이 2.5점, 검찰, 대기업에 대한 신뢰는 2.2점으로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부처에 대한 신뢰도는 그나마 전년에 비해 0.3점이나 올라서 2.3점이지만, 국회는 1.8점으로 가장 낮습니다. 2점보다 낮다는 것은 대놓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정치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트러스트>에서 ‘국가 경쟁력은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군요. 우리는 이래서 아직 '선진국'이 아닌 것이었군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국인 하면 정(情) 아닌가요? 정이 한국인의 대표정서라면서요. 끈끈한 우리-정 관계로 맺어져 있고 매일같이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는 한국인들은 왜 서로 사기를 못 쳐서 안달이고 어려울 때 도움받을 사람이 하나 없을까요?
우리 사회가 왜 이리 각박해졌을까.. 나부터 돌아봐야겠다. 반성이 시작됩니다. 아, 정말 불행하다. 힘들 때 도움받을 사람 하나 없다니.. 이렇게 우리의 불행회로는 또 돌아갑니다.
지금까지 인용한 조사결과만 보면 한국인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사회 시스템에서 서로 사기치기 바쁜 사람들이 호시탐탐 서로 등쳐먹을 기회만 노리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족속처럼 느껴집니다. 각계의 전문가들과 언론도 한국은 '저신뢰 사회'라는 전제에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국가비교 통계 사이트인 넘베오(NUMBEO)에서 2018년 120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해외 여행객들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한국이 뽑혔습니다. 2019년 조사에서는 순위가 조금 내려가긴 했지만 한국을 다녀간 많은 외국인들이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안전한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에는 유럽의 관광지에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소매치기도 없고 커피숍이나 식당에 가방이나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하철에서 놓고 내린 물건도 나중에 분실물 보관소에 가보면 웬만큼 찾을 수 있죠.
한국에서는 정전이 되도 도시가 파괴되거나 상점이 털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신뢰수준이 높다는 국가들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이런 문화는 신뢰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일까요?
요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뢰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사적 신뢰와 공적 신뢰가 그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수준과 그 사회의 기관 및 시스템에 대한 신뢰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한국인 심리를 연구해 온 연구자의 입장에서 한국인들의 일반적 신뢰수준은 높은 편이나 기관 및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낮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공적 영역에 대한 낮은 신뢰는 우선 역사적으로 한국의 국가 시스템이 한국인들에게 행해왔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기억이 닿는 한 구한말에서부터 극히 최근까지 한국의 국가시스템은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망국과 식민지, 내전과 독재를 경험한 이들이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되고 이만큼이나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아마도 사적 신뢰체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같을 거라는 전제에서 살아갑니다(심정의 성격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77). 그래서 정도 많고 다른 이들과 가까워지기도 쉽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오해도 많고 속상할 일도 많죠.
이러한 믿음체계가 커피숍에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는 이유이고 사기범죄가 많은 것 역시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설마 내 노트북을 가져가겠어?’라는 생각으로 물건을 두고 다니고, 사기범들은 ‘저 사람이 설마 나한테 사기를 치겠어?’라는 사람들의 신뢰를 거꾸로 이용하는 것이죠.
일본은 어떨까요?
앞서 언급한 <트러스트>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한국을 대표적인 저신뢰 사회로 분류한 반면, 일본은 미국, 독일 등과 함께 고신뢰 사회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통념을 다시 생각케 하는 연구 결과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사토 요시미치의 한국과 미국, 일본을 비교한 연구에서 한국인들의 일반적 신뢰수준은 53%로 미국(34%)과 일본(20%)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쿄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 하리하라 모토코는 서울과 뉴욕, 도쿄의 지하철에서 승객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비교했는데요(2010년).
100구간 당 상호작용의 빈도에서 서울은 45.4회, 뉴욕 26.2회, 도쿄 6.6회의 상호작용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행동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리하라 교수는 한국인들의 대인관계망의 크기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크다고 말합니다. 인간관계를 맺는데 적극적이고 스스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야마기시 토시오는 일본은 신뢰가 높은 사회는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일본은 '안심할 수 있는 사회'이지 '신뢰가 높은 사회'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신뢰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그런 믿음과 기대가 있으면 일본인들의 일반적 신뢰수준이나 대인관계망의 크기가 그렇게 작게 나오지는 않았겠죠.
저는 '알고 봤더니 한국이 고신뢰 사회고 일본이 저신뢰 사회더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에는 일반적 신뢰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있고 그 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신뢰의 차원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의 낮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영역에서의 높은 신뢰 수준 역시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자 우리가 당면한 여러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핵심적인 열쇠로 작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높은 신뢰는 그들의 사회 시스템과 공적 영역에 기반한 것입니다. 반면, 일반적 타인에 대한 낮은 신뢰 역시 일본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며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제가 강조하고픈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