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어떤 영화가 크게 흥행했다는 사실은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요소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에는 당연히 뭔가가 많이 있겠죠. 많은 이들이 분석한 바와 같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한 세계, 터미네이터라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살인기계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눈 돌릴 새 없는 화려한 액션, 미래에서 온 사람이 현재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타임패러독스, 기계와 인간의 우정, 운명을 바꾸는 건 우리라는 철학적 메시지 등 매력적인 요소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번 글에서 살펴볼 부분은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나타나는 문화적 상징입니다. 어떤 나라에서 만들어진 문화콘텐츠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배어있습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집어넣지 않아도 말이죠.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풀려야 왠지 만족스럽다던가 주인공은 왠지 이런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같은 것들이 문화에서 오는 것들인데요.
미국의 문화콘텐츠에는 의외로 종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미국이 기독교 국가(에 가까운 나라)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시다시피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필그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따라서 미국 문화의 여러 곳에 기독교의 모습이 깊이 배어있죠.
미국의 문화콘텐츠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기독교적 상징은 영웅(hero)인데요. 영웅물의 효시 슈퍼맨을 필두로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아쿠아맨, 앤트맨, 플래시, 아이언맨, 이터널스 등등 아주그냥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영웅의 특징은 쫄쫄이를 입는다는 것 외에도 '세상을 구한다'는 것이 있는데요. 사실 세상을 구하는 것이야 말로 영웅의 조건입니다. '이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상징은 미국인들의 무의식에서 왔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원형(archtype, 原型)은 예수입니다. (참조: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07)
기독교에서 예수는 구세주(救世主)입니다. 세상을 구하는 분이죠. 미국인들은 그들이 동경하는 영웅에서 세상을 구하는 자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온갖 콘텐츠에서 영웅들은 세상을 구하느라 바쁩니다.
<터미네이터> 역시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라 코너의 아들 존은 기계의 반란으로 멸망한 세상에서 기계들에 대항해 저항군을 이끌고 인류를 구할 인물입니다. 구세주, 즉 예수에 해당하는 인물이죠. 그런데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존의 영웅상은 그렇게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1, 2편에서 존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 소년으로 묘사됩니다. 대신 중요 인물은 존의 어머니 사라 코너죠. 사라는 미래에서 자신을 지키러 온 군인(카일 리스)과의 사이에 존을 낳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 즉 마리아에 해당하는 인물이죠.
이런 시각은 2019년에 나온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터미네이터에게 아들 존 코너를 잃고 또 다시 올 터미네이터에게서 누군가를 지키던 사라 코너는 대니(나탈리아 레예스 분)를 (자신에 이어) 구세주를 낳을 여인으로 생각하는데요.
세상을 구할 구세주와 그를 낳은 여인.. 이라는 예수와 마리아라는 상징이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물론 <다크 페이트>에서 구세주는 대니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대니 자신이었지만요. 이 점에서 <다크 페이트>는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려 한 페미니즘? 영화로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사라 코너는 왜 사라 코너일까요? 구세주의 어머니 이름으로는 메리(마리아)라는 이름도 있었을텐데요. 아무래도 메리는 너무 노골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겠습니다. 상징이란 드러날 듯 말 듯 숨겨져 있어야 그것을 찾아서 해석하는 맛이 있을 테니까요.
사실 흔한 영어권의 여자 이름인 사라(Sarah)도 기독교와 관계 깊은 이름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인데요. 아브라함은 신으로부터 '네 자손이 밤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만큼 많으리라'는 축복을 받은 인물입니다. 또한 신은 그 축복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했죠.
따라서 사라라는 이름은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의 어머니'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 존이 구한 세상에서 태어날 사람들 말이죠. 그러고보니 예수님은 자손이 없기도 하셨구요. 그래서 존의 이름이 조쉬(Josh)나 조슈아(Joshua)가 아닌 거겠죠.
그러고 보면 존(John)의 이름도 의미가 있습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근간인 <터미네이터>1편과 2편은 기계들의 반란으로 멸망한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존은 미래를 예언하는 자인 것이죠. 핵전쟁으로 멸망한 미래든, 기계들을 막아낸 미래든 말입니다.
예언자 요한(John)은 예수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세례 요한'도 있고 성경의 마지막 권 '요한계시록'의 요한도 있습니다만,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세상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사라 코너의 아들 존은 '요한계시록'의 요한에서 온 이름임이 분명해 보이는군요. <터미네이터 2>의 부제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심판한 기계들은 신(神)일까요? 인간이 만든 기계가 전능한 존재가 되어 결국 인간을 멸망시키는 날이 올 지 모른다는 공포는, 자꾸만 힘을 갖게 되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데 대해 현대인들이 갖는 가장 근원적인 공포인 것 같습니다.
<터미네이터>시리즈 5편의 부제인 제네시스(Genesys)는 성경의 첫 권 창세기(Genesis)와 시스템(system)의 약자입니다. 세계의 모든 기계들을 연결하는 사물인터넷(IoT) 시스템이 가동되는 날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날이 될 거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이죠.
<터미네이터5: 제네시스>에서는 인류해방군의 지도자이자 구세주인 존 코너는 끝내 기계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존의 모습을 한 터미네이터가 사라 코너를 죽이러 현재로 오는데 이 부분은 적그리스도(anti-chirist)의 등장과 관계있어 보입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의 서간문 요한 1,2서에는 세상의 종말 후 예수가 재림하는데 그 전에 자신이 그리스도라 주장하는 가짜 예수(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구절이 있죠.
뭐 상징을 찾자면야 끝이 없겠습니다만 상징을 많이 쓴다고 좋은 영화는 아닐 겁니다. 특히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는 문화적 상징 같은 거 꾸역꾸역 숨겨놓는 영화들 많은데 상징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힘들죠.
터미네이터가 어느덧 6편까지나 나왔지만 명작 소리를 듣는 건 한두 편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터미네이터나 화려한 뿌슝빠슝 액션을 보려고 터미네이터를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튼 많은 이들이 공감한 문화콘텐츠에서 공감의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돈은 안되지만 참 즐거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