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노트03. 브런치
한 달 전부터 스몰토크의 주제는 이 긴긴 추석연휴에 거창한 계획이 있는지였다.
저요, 저는 연휴에 아무 계획도 없어요. 그냥 서울 여행이나 좀 다녀볼까봐요.
인스타에서 보고 언젠간 가봐야겠다 하고 저장한 그 곳들을 드디어 갈 생각이다. 지도 앱 셀 수 없이 많은 곳에 별표가 쳐져있다. 하지만 지금 날 좋은 가을 아까운 연휴에 딱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으니 다시 엄선해야 한다.
장르엔 망설임이 없다. 무조건 브런치다. 저녁을 밖에서 먹으면 뭔가 부담스럽다. 점심 즈음 예쁜 브런치 가게 공간과 그 곳에서 파는 음식들이 주는 여유와 분위기를 즐기는 게 좋다. 한 10년간 외식만 하면 이런 데를 다녔더니, 사진만 봐도 내가 좋아할만한 곳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아닌 데부터 걸러낸다.
샐러드에 발사믹 식초가 뿌려져 있다? 거른다. 샌드위치 빵이 흔히 보이는 식빵이다? 역시 거른다.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라는 것이 있다?(보통 소세지와 베이크빈이 들어감) 바로 패스. 브런치를 검색해서 나오는 식당 메뉴에 이런 음식들이 펼쳐져있으면, 미안하지만 살짝 기만당한 기분이다.
발사믹 식초라든가, 식빵이나 소세지 같은 재료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예측 가능한 맛이다. 사진만 봐도 음식에 어떤 철학이나 정성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보통 그런 브런치 메뉴는 근교 대형 카페라든가 브런치를 판다는 프랜차이즈 식당, 아니면 맛집 문화와는 다소간 거리가 먼, 수도권 어딘가의 우리 동네 친근한 브런치 가게에 많이 판다.)
나는 브런치에 바라는 게 많은 사람이다.
공간은 너무 격을 갖추지 않은 곳이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캐주얼하지만 적당히 힙한 구석도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나무와 스틸과 색감이 어우러진 높은 감도의 인테리어가 되어 있으면 금상첨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소리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워서는 안 되고, 감상이 가능한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웃으면서 맞아주는 곳이라면 잘 찾아왔구나, 하며 곧 마음의 평화까지 얻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브런치 가게에 갖추어야 하는 기본 메뉴가 있다.
파스타와 피자는 없어도 된다. 대신 다채로운 재료로 구성한 샐러드와 계란 요리, 따뜻한 스튜나 스프같은 요리가 있거나, 익힌 채소가 푸짐하거나, 건강한 식사빵과 스프레드가 함께 나온다거나, 특별한 샌드위치가 있다거나 해야한다. 익숙한 듯 하지만 한끗 다른 맛을 느끼길 원한다.
먼저 샐러드에는 깔끔하고 싱싱한 푸른잎이 들어가야 한다. 내 돈 주고는 잘 안 사먹을 것 같은 이름 모를 유럽의 샐러드 풀이었으면 한다. 좋은 재료, 담백한 맛. 그리고 색이 아름다워서 보기에도 좋길 바란다.
달걀이 들어간 음식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 특히 부드러운 계란으로 아주 심플하게 만든 오믈렛이 있으면 좋다.
이상적인 오믈렛은 통통하고 양옆으로 길쭉해서 먹기 아깝다. 연약한 오믈렛에 나이프를 대고 주욱 반을 갈랐을 때, 치즈가 흘러나온다면 이내 황홀해진다.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흔한 모짜렐라 피자치즈 말고 좀더 꼬릿한 냄새가 나는 치즈이면 더욱 좋다.
스크램블 에그도 좋은데, 은근히 이걸 파는 데가 잘 없다. 시드니에서 먹은 스크램블처럼 버터향이 가득하고 입에서는 살살 녹는 것. 호주식 브런치를 하는 빌즈, 써머레인 같은 곳을 가면 있기는 하지만 가격 대비 만족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 문제다.
실은 한국의 브런치 가게에서 오믈렛이나 스크램블처럼 계란이 주인공이 되는 메뉴보다는, 좀더 식사가 될만한 응용편을 찾아보기가 더 쉬운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에그인헬인데, 샥슈카라고도 부르는 이 중동 베이스의 브런치 메뉴는 이제는 꽤 전통의 코리안 브런치 메뉴로 자리잡은 것 같다. 달걀의 순수하고 고소한 맛과 새콤하고 맵쌀한 토마토 소스의 조화가 좋고 속도 든든하게 채워준다.
하지만 개인 순위에서 에그인헬을 완전히 치고 올라온 브런치 메뉴가 있다. 그건 바로 칠리에그. 사진을 봤을 때부터 이게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해서 그 카페에 찾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처음 칠리에그를 맛본 순간은 정말 충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달걀, 구운 채소, 리코타치즈, 그릭요거트, 허브, 견과류, 그리고 알 수 없는 빨간 칠리오일이 한 접시에 모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건 맛의 경험이었다.
어떻게든 레시피를 알아내고 말리라 다짐한 후로부터 이 년 후, 나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터키쉬 에그' 영상을 보게 되었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하며 집에서도 칠리에그를 곧잘 해먹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브런치 집은 빵도 잘 해야 한다.
치아바타나 크루아상보다는 사워도우나 포카치아같은 담백하고 향이 좋은 발효빵을 선호한다. 계란 요리와 함께 먹거나, 후무스를 곁들여서 먹으면서 바삭한 크러스트까지 즐긴다.
실은 이런 빵이 포함된 단순한 플레이트를 하는 곳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복잡한 요리도 없이 그저 깨끗하고 좋은 재료를 선별하는 사장님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곳 말이다.
치즈와 계란,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보기 좋게 배열하고 버터나 디핑소스를 함께 두어 맛의 밸런스도 챙긴, 색감과 구도까지 아름다운 한 접시는 작품과도 같다. 배는 가볍게만 채워도 그만이다.
어떤 특별함을 원하면서 굳이 집에서 나가지만, 결국 집과 비슷한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이 좋다. 너무 자극적이면 금방 피로해진다. 일상의 결을 지키면서도 잠깐의 변주를 주는 정도가 딱 좋다.
삶의 진폭이 너무 크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자주 가도 질리지 않고, 많이 먹어도 부담이 없는 것들로만 채워진 곳을 이렇게 평생 찾고 있다. 기본이 중요하지만, 킥이 없어서도 안 된다. 그 환상의 리듬을 찾는 게 숙제다.
내가 찾는 브런치는 아마 내가 살고 싶은 하루의 모습과도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