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하는 햄스터의 피곤한 행복

음미노트05. 완두콩 브루스케타

by 원테이크


연휴 내내 내린 가을비가 이제야 좀 그치려는 것 같다. 드디어 <데미안>을 다 읽고 아침에 책장을 덮은 날이었다.


언젠가 가야지, 하고 네이버 지도에 별표 쳐둔 곳을 가기로 했다. 찜해둔 카페들만 벌써 수백 개. 하지만 비 오는 날씨와 지금 무드에 딱 맞는 곳이 필요하다. 정확히 내 취향인 곳을 가야 하며 실패하기 싫었다. 그러던 중, 인스타 피드에 귀신같이 뜬 그 가게 광고를 보았다.


여기로군. 오랜만에 행궁동을 가보자.



우리 동네는 맛과 멋은 거리가 좀 있는 정말 아파트만 있는 주거지역이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브런치 가게를 찾아가려면 수고를 좀 들여야 한다.


한번에 가는 버스가 너무 늦게와서 두 번이나 갈아타고 먼 길을 간다. 그래도 모처럼 유튜브 알고리즘이 좋은 앨범을 찾아 주어, 우주와 자연의 소리를 담은 재즈를 하염없이 들으면서 차창을 바라보았다. Matthew Halsall. 마음에 남은 소설의 여운을 어루만져주는 음악이었다.


엄청나게 큰 버드나무가 늘어선 개천을 따라 걷는다. 버드나무가 비에 곱게 빗은 초록빛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찻길을 벗어나 조용해지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졌다. 천천히 걸었다.


행궁동은 물이 있고, 궁이 있고, 고도가 매우 낮은 집들이 있어서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다. 원체 땅값이 싼 곳인지 신점 보는 데도 여전히 많아 뒤죽박죽인 그 곳이 흥미롭다. 5년 전과 비교하면 행리단길 메인스트리트에 올리브영과, 큰 편의점, 무인 스티커 사진관 따위가 많이 생겨 젠트리피케이션을 면하지 못하긴 했다. 단골로 마음 두던 데가 자꾸 변하고 없어지는 게 아쉽다.


그래도 행궁동 사이드에 다른 멋진 가게들이 여전히 야금야금 생기고 있어서 주기적으로 가주어야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연희동보다는 좀더 성수 변두리의 세련된 가게 비슷한 분위기가 많다고 해야하나?





가고 싶던 그 카페가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그렇게 훤히 오픈한 채 가을 바람을 허락하는 공간이 참 좋다. 그런데 웬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 앨범이잖아. Duke Jordan의 Flight to Denmark가 재생되고 있다. 이런. 내 취향의 가게 냄새를 아주 정확히 탐지해냈다. 조금 축축했던 기분이 확 산뜻해졌다.


뭘 먹을지는 당연히 오기 전부터 맘 속에 정하고 왔다. 이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인 완두콩 브루스케타. 어떤 맛인지 알 것 같지만 그 맛을 반드시 직접 확인해 봐야만 했다.


망설이지도 않고 주문하려는데, 빵은 바게뜨가 아닌 슬랩으로 대체된단다. 전혀 문제될 게 없다. 타르틴 슬랩은 너무 좋아하는 샌드위치 빵이니까.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게 아름다울 수 있죠


완두콩 브루스케타에는 진짜 좋아하는 것만 들어있었다. 그릭요거트, 완두콩, 슬랩, 알 수 없는 그린 오일. 아, 이 오일을 어디선가 먹어봤는데 도저히 생각해내지 못했다. 허브를 넣어 만든 오일 같은데 약간 달짝지근하면서도 허브 향이 코를 싹 감싸주었다.


너무 달지 않은 그릭요거트와 적당히 삶아진 완두콩의 조합이 좋다. 담백한 빵 껍질을 씹으면서 고소함을 즐기다가도, 오일이 스며들어 부드러워진 빵의 속살을 살짝 떼어 슬쩍 단 맛을 맛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썰어 먹는다.


아까워서 조금씩 조금씩 썰어 먹는다. 불과 두 달 전의 나였다면 한 입에 넣고 와구와구 먹었을텐데. 9월 한 달 다이어트를 한다고 밀가루를 입에 안 대던 차, 정말 오랜만에 탄수를 허락했다.


나는 기록 변태라 매일 먹는 음식을 식단앱에 기록한다. 오늘 먹는 이 맛있고 유니크한 음식에도 예외는 없다. 오, 슬랩이 이렇게 탄수가 높았다니. 공깃밥은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샌드위치는 참던 습관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은 것이었군.


그래도 이 특이한 샌드위치는 탄수화물 비중은 높지만 당은 낮아, 그릭요거트가 들어가있고 완두콩도 많아서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훌륭하게 보완될 거야. 그러니까 이건 다 먹어도 괜찮아. 먹으면서 삐릭삐릭 계산기를 돌린다.




어느 날 지피티에게 "roast me(나를 팩폭해서 평가해봐)" 프롬프트를 넣었을 때 붙여준 별명이 있다.


"넌 관리하는 햄스터야." 탄수화물 5g 더 먹었다고 큰일이 날 것처럼 하다가도, 그래도 이 빵은 당이 낮으니까 한 입만 먹을게? 하는 게 귀엽다나.


팩폭을 하라고 했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끄덕끄덕) 스스로 엄격했다가도, 금세 풀어주고 마는 내 성향을 그대로 읽혔다. 샌드위치를 먹고는 싶어도 너무 당과 포화지방이 높으면 안돼, 그래도 남기는 건 좀 아쉬우니까 다 먹어야지, 특히나 이렇게 아름답고도 영양 비중도 훌륭하고 재료도 신선하며 창의적인 샌드위치라면 말이야.




같이 시킨 하우스와인을 홀짝거리면서 비에 젖은 골목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홍콩도 아닌, 발리도 아닌, 행궁동의 풍경이다. 더이상 자본이 너무 들어오진 않았으면, 그러면서도 재밌는 가게들이 많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양가적인 바람을 가지면서, 꼭 없어지기 전에 다시 와야지 다짐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가게들은 늘 없어지거나 사장님이 바뀌곤 하니까. 하지만 또 너무 자주 오면 질릴까봐 주기를 두고 와야지 생각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양극단을 오갈 건지, 나도 날 잘 모르겠다.


Duke Jordan 앨범은 가게를 나설 때까지 되풀이 재생되고 있었다.



/ 이 멋진 공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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