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줄 아는 분이시네요"

음미노트07. 미트파이

by 원테이크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할 때, 과연 이 취향의 뿌리가 뭔지 대체 감도 안 올 때가 있다. 특히 미트파이나 키쉬. 서유럽 물은 먹어보지도 못한 내가 왜 영국 본토 음식인 파이나 프랑스 음식인 키쉬를 이렇게 찾아헤매게 된 건지 모르겠다.


미트파이와 키쉬는 모양도 다르고 필링도 다르지만 맛있는 무언가를 페이스트리빵으로 만든 그릇으로 감싸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버터리하면서도 고소한 빵그릇 그 자체와 필링의 조합을 좋아하는 것 같다. 굳이 비교하자면 만두랑 비슷한 구조이긴 하지만, 난 쫄깃하고 말랑한 만두피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단단하고 밀도 높은 질감에 바삭한 크러스트가 느껴지는 파이지가 좋다.


아직 이 나라에서는 파이류가 그렇게 대중적인 음식은 아닌 것 같다. 잠봉뵈르가 유행하듯, 크룽지와 소금빵이 유행하듯, 파이나 타르트류가 얼른 유행해줘야 먹고 싶을 때 골라 먹을 선택지가 많아질텐데. 안타깝게도 파이는 아직 인플루언서들의 픽을 받지 못했다. 아마 그 날이 오면 나는 선견지명을 당당하게 얘기하겠지, "나만 아는 키쉬가 모두의 키쉬가 돼버리다니~"



그래서 모처럼의 해외 여행에서는 그렇게 파이를 찾아다닌다. 홍콩에 갔을 땐 키쉬를, 호주에 갔을 때는 미트파이를 제대로 하는 곳을 열심히 리서치했다. 그러나 운명의 파이는 리서치한 곳이 아니라 시드니 어느 마트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미트파이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시드니의 비바람치는 날씨에 황당해하며 하루 종일 걸은 날. 쌀쌀한 기온이 피부에 스미고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굳이 굳이 호주산 소고기로 직접 스테이크를 해먹자고 에어비앤비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알록달록한 식재료를 보니까 기운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먹거리를 잔뜩 쇼핑하고 계산대로 가는 길, 눈 앞에 큰 오븐이 보였다. 파이다. 파이들이 가지런히 줄을 지어 층마다 진열되어 있었다. 호주 본토 파이 느낌인데? 맛있겠다... 하지만 어차피 곧 저녁먹을 텐데, 안 사는 게 좋겠지. 애써 외면하며 다시 계산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남편이 카트에 봉투 하나를 슥 집어넣는다. 파이 봉투잖아? 못 이기는 척... 계산을 하고, 우리는 마트를 나서자마자 식기 전에 먹자며 분주하게 파이를 손에 집어 들었다.





자고로 호주 미트파이는 나이프가 아니라 손에 들고 먹는 것이라 배웠다. 한 입을 베어 물었다.




"??!"


뭐지 이 맛은. 오늘 걷느라고 잔뜩 지친 심신을 따뜻하게 데워주면서, 기분을 노곤하고 평온하게 만들어준다. 필링이 그냥 다진 고기가 아니었다. 뜨끈하고 푸짐한 스튜가 꽉꽉 차있다. 소고기 청크도 뭉텅뭉텅 들어가 있다. 숙성된 토마토의 맛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트 앞 길바닥에 서서 나 한 입, 남편 한 입 나누어 다 먹어치웠다. 따뜻했다. 추위가 모두 가시는 듯했다.


도대체 이 파이 어디서 파는 거야? 잃어버린 고향의 맛이다. 알고 보니 그 미트파이는 마트에서 만들어 파는 게 아니라, 유명한 베이커리의 파이를 마트에서 파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원조를 찾아가자.


그 곳은 Bourke st. Bakery라는 아주 작은 가게. 파이와 사워도우와 타르트가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빵들만 있다! 아마 다시 호주를 간다면 무조건 다시 찾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버크스트리트베이커리의 미트파이. 비프 와인 어쩌고도 맛있었다


멜번 퀸즈마켓에서도, 인스타에서 핫한 베이커리에서도 미트파이를 사먹어봤지만 그 맛은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런 미트파이를 맛볼 수 있을까 하고 핫플레이스인 성수와 용산의 파이도 먹어봤지만, 역시 그 맛은 아니다. 건조한 다짐육만 들어간 미트파이 말고, 혀가 데일 것처럼 뜨거운 스튜가 담긴 미트파이는 다시 그 곳에 가야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서대로 멜번 무슨 유명 베이커리, 성수 호과당, 용산 브레니파이 칸틴
흠, 그 미트파이 맛이 아니다



그래도 아직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다. 집주변에 찾아보니 아예 '호주미트파이'가 상호인 가게가 있다. "이름이 이렇게 노골적이면...ㅋㅋ 우리가 맛본 그 미트파이를 팔 수도 있잖아?"


어게인 호주 데이트를 하자며, 모처럼 한가한 주말이라 남편과 광교에 나들이를 나갔다. 약간 쌀쌀해진 늦가을에 단풍이 든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꼭 잡은 손도 시려와 잠바 주머니에 푹 찌르고 가는데, 운명의 파이를 발견했던 그 날의 시드니와 데자뷰가 느껴졌다.


반신반의를 하면서 파이를 시켜본다. 오리지널 하나, 머쉬룸 하나. 귀엽게 호주 깃발이 꽂힌 파이가 나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챙기기는 했지만 나는 호주가 고향인 사람이니까(?) 손으로 먹는다. 아, 괜찮은 것 같은데? 반반 나누어서 먹어보니, 머쉬룸 파이가 제대로다. 우리가 먹었던 그 파이처럼, 김이 펄펄 나는 스튜가 담겨있었다.



이건 미트파이의 단면


"그 맛이네, 그 맛ㅎㅎ"


다 먹고 나오며 배달도 하시느냐 물어보았다. 호주에서 먹어보고 계속 생각나서 찾아왔다고. 사장님이 "어쩐지, 먹는 것만 보고도 알았다니까요." 하신다.


뭘 보았고, 뭘 아셨다는 건가?!


"손으로 딱 들고 드시더라구요. 먹을 줄 아는 분이구나, 했죠."


제대로 된 가게를 찾은 것만 같다. 이런 가게를 찾았을 때의 희열이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다. 소금빵처럼, 잠봉뵈르처럼 흔히 찾을 수는 없는 마이너한 취향이지만, 어디선가는 이 주파수에 공명하는 사람이 있다는 위안이다. 안테나를 세우고 다니다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일 수도.


/ 그 미트파이를 팔던 곳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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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