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크리스마스

음미노트09. 은대구 굴 파피요트

by 원테이크


지난 글 발행일이 벌써 한 달 전이다. 글 쓰지 못하는 핑계는 많지만, 이번 달은 유독 회식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몇 차례나 회식을 했지만 단골 메뉴는 역시 구워먹는 고기다.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난 부드러운 붉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한 해를 보낼 수 없다는 듯이 획일적인 메뉴다. 하지만 영롱한 고기를 누가 마다할까. 소고기는 특히 폭력적으로 맛있고 비싸니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회식 주최자는 예산에 맞는 고깃집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



바깥에서 이렇게나 고기를 흔하게 먹기 때문에, 우리집 냉장고에는 구이용 육고기를 두지 않는다. 폭력적으로 맛있는 것은 대체로 몸에 좋지 않다. 특히나 소고기는 포화지방이 너무 많다. 마이야르 반응은 노화를 촉진한다. 집 밖에서 고기의 총량을 채우고 잔뜩 몸에 부담을 주었으니, 집 안에서만큼은 오버된 양을 통제해야한다는 것이 나의 건강 철학이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기름으로 입맛과 속이 다 코팅되어 이젠 더이상 고기는 못 먹겠다고 생각할 즈음,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외식을 많이 해서 나가 먹을 생각은 없고, 집에서 기분내고 싶은데 바빠서 식재료도 못 사두었다.


이브날 아침 출근길에 컬리를 검색해가며 열심히 먹계획을 짜본다. 당연히 고기는 패스, 하지만 웨이트하는 여자로서 양질의 단백질원을 빼놓을 순 없다. 닭도 좋은 단백질이지만 냉동실에 닭가슴살을 쌓아두고 먹다보니 가금류도 패스. 그렇다면 아주 담백한 생선을 파티 느낌으로 조리해 먹어야겠다!





빠삐요뜨.


집들이 많이 할 때 해먹었던 빠삐요뜨를 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퍼득 떠올랐다. 빠삐요뜨는 종이 호일 양 끝을 사탕 봉지처럼 말고, 그 안에 생선과 각종 채소, 화이트와인과 올리브오일, 버터를 넣고 싸매어 오븐에서 익혀 먹는 요리인데 모양이 꽤 화려해서 파티에 어울리는 음식이다.


빠삐요뜨에 들어갈 흰살 생선으로는 대구를 낙점했다. 온라인 스토어에 없어서 스테이크용 은대구를 겨우 찾았다. 요즘 제철인 굴도 보이기에 냉큼 주문했다. 만드는 방법도 참 쉽다. 다른 조리 없이 재료만 왕창 준비하고 한꺼번에 넣은 뒤 조금만 오래 익히면 끝난다.


종이호일 그릇에 충분히 해동한 은대구를 세팅하고 브로콜리, 파프리카, 버섯, 편마늘을 넘치도록 곁들였다. 굴을 넣으면 생선 맛에 방해가 될까봐 따로 익혀 먹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때려넣고, 소금과 후추로 충분히 간을 해 주었다. 버터는 없으니까 빼고 올리브오일만 세바퀴쯤 충분히 뿌려준다. 맛술이 있다면 화이트와인도 굳이 필요 없다. 휘휘 뿌려주고 종이호일을 잘 봉한 뒤에 오븐으로 직행시켰다.


30분이면 다 익을 줄 알았는데 까보니 아직 냄새도 안 나고 속살이 절반 정도밖에 익지 않아서 20분쯤 더 익혀주었다. 오븐에서 슬쩍 체크해보니 냄새가 기가 막힌다.





드디어 시식 타임. 먼저 생선 한 점을 맛본 남편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 "우와, 이거 뭐야?" 하, 참을 수 없이 나도 얼른 국물과 함께 대구를 먹어 본다.


원물이 기가 막히는 생선이었다. 담백한데 동태같은 퍽퍽함이 전혀 없는, 아주 부드러운 속살이었다. 생선 고유의 고소함과 올리브오일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정말 고급 식당에서 먹는 것 같았다. 국물 한 숟가락을 먹어보니 감칠맛 폭발이다. 소금, 후추, 맛술 말고는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았음에도, 해산물에서 우러나온 깊은 맛이 마치 참치액을 넣은 듯한 맛이 났다.


비밀병기가 굴이었나보다. 오랜 시간 오븐에서 푹 익는 동안 원재료의 수분이 국물을 만들며, 어디서도 사먹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해산물의 감칠맛을 끌어냈다. 내가 했지만... 너무 맛있는 거 아니야? 때로는 정말 단순한 재료와 단순한 조리법이 이렇게 최고의 맛을 낼 때가 있다.




가끔 집밥이 너무 만족스러울 때면,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박수를 친다. 브라보...! 요리를 진두지휘한 자신과 이 요리를 즐긴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식사라는 공연을 잘 마친데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연말 회식으로 느글거리는 속을 개운하게 하면서도, 파티 느낌은 물씬 느낄 수 있는 은대구 굴 빠삐요뜨 덕분에 크리스마스 집콕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2025년 한 해가 벌써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놀랍게도 회식도 여전히 남아있다.


회식 메뉴가 과한 음식이라고 잔뜩 투정을 부렸지만, 실은 막상 식탁 앞에 가면 절제가 잘 안 된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잠깐 무너지더라도, 집밥을 해먹으며 균형을 회복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으니까. 좋은 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하면서 조각난 정신과 마음을 모으고, 그렇게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몸을 달래주는 기술은 꽤나 유용하다.


한 살을 더 먹기 전에 조금은 어른이 된 것만 같아서 그것으로 충분히 뿌듯한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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