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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래 Oct 31. 2024

오래된 것들

김완선 - 이젠 잊기로 해요


그대 생일 그대에게

선물했던 모든 의미를 잊어요

술 취한 밤 그대에게 고백했던 모든 일들을 잊어요

눈 오던 날 같이 걷던

영화처럼 그 좋았던 걸 잊어요



한가로운 오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운 좋게 빈자리가 있었다. 앉아서 별생각 없이, 평소와 똑같이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미미하게 생소한 진동이 느껴졌다. 좌석 위의 에어컨과 함께 부착되어 있는 스피커가 울리고 있었다. 맨날 에어컨 바람 방향만 조절할 줄 알았지 그 옆에 스피커가 부착되어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스피커에서는 20년쯤은 지난 묵은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이젠 잊기로 해요 - '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리메이크되어 나왔던 노래라서 귀에 익은 멜로디 었다. 리메이크되어 드라마에서 흐르는 노래의 멜로디가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다. 새삼 이렇게 오래된 노래도 알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뿌듯했다. (별 것도 아닌 이상한 걸로 자주 뿌듯해한다.) 흘러나오는 노래 덕에, 머리 위에서 울리는 진동 덕에 좌석 위에 스피커가 부착되어 있었다는 걸 생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버스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버스에서는 라디오 속에서 디제이와 게스트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고 어떤 버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던 적이 있었는데, 이 날 탔던 스피커가 울리는 버스가 단연 내가 탄 버스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버스였다. 흔치 않게 온 버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스피커 속에서 잔잔하고 울림 있게 타닥거리던 오래된 기타 선율이 정말 오랜만에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오래된 노래에는 그 시절을 상상하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어떤 한 시절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그 시절 사람들의 옷차림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었을까, 지금의 우리처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삶을 살지는 않았겠지?, 그럼 뭘 하면서 대중교통을 탔을까, 그냥 멍을 때렸던 걸까?, 아니면 지금과 다르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려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별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닌다.


쓸데없이 풍부한 상상력 때문에 옛날 노래를 듣거나 옛날 영화를 보기라도 하면 하루 이틀은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예전 음악가들이나 아티스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특히 그렇다. 한 번은 한창 사람들에게 인기였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뒤늦게 봤는데, 적어도 사흘 정도는 그 영화만 돌려봤던 것 같다. 심지어 내가 프레디 머큐리가 된 꿈도 꿨었다.(진짜, 정말이다.) 옛날 노래 중에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참 좋아하는데 이 노래도 나의 지나친 감수성 때문에 들으려면 조금 용기가 필요하다.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꽂는 순간 내 귀에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자꾸 나를 생각의 저 너머로 데려가려고 한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절의 옛 것에는 말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감성을 건드리는 정말 묘한 힘이 있다. 한 번 재생하는 순간 그 하루 동안은 노래 속의 화자처럼 또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살게 하고, 살고 싶게 한다.


나는 그 많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나오는 리메이크된 노래들 중 '이젠 잊기로 해요'가 왜 때문인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듣기 쉽지 않은 복고풍의 악기 선율과 오래된 책방에 들어간 것 같은 그 노래가 풍기는 향이 있다. 음악 하나로 그 음악이 자주 흘렀을 한 시절을 상상하게 한다. 오래된 노래엔 이런 매력이 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내가 지금 자주 듣는 노래들이 '옛날 노래'가 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과연 그때 그 노래들을 들어도 내가 지금의 옛날 노래를 들으면 느끼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 묵은 앨범을 꺼내보는 느낌, 오래된 책방 책장의 나무 냄새를 맡는 듯한 느낌. 내가 생각하기에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시절의 감성과 분위기는 그때마다 다를 테니까. 그래서 내가 오래 전의 것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느낌이 좋다. 빠지다가 빠지다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경계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날 버스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노랫가락이 그러지 말라고, 그냥 그 감정을 충분히 느끼라고 간질거리는 기타 선율로 나에게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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