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보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 필자는 대치동 키즈는 아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시골 소도시에서 자랐다.
엄청난 교육열로 인해 인구 십만 넘는 도시면 학원 없는 곳 없는 대한민국이지만 내 어린 시절은 교육경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일하시기 바쁘시고, 주말마다 어린 자녀들과 소소하게 바람 쐬러 나가는 것이 낙이셨고,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경쟁에 대한 큰 계획 없이, 내가 학교에서 적당히 수업을 잘 따라가는 것에 만족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세상 편하게 친구들과 놀고, 주말에는 부모님과 가까운 산에 캠핑 가서 계곡에 있는 고기도 잡고 그랬던 것 같다.
쉬운 영단어를 학습지로 배우는 걸 제외하면, 영어 공부는 초등학교 3학년 학교 정규교육과정에 따라 시작했었다. 영어 유치원 안 가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요즘을 생각하면 정말 정직하게 공부를 시작했던 것 같다.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고학년, 어머니는 점점 나와 동생의 교육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셨다.
여기저기서 우리 아이 공부가 많이 늦었다고 느낄 만한 정보를 듣고 오셨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날 영어가 많이 늦은 아이 실력을 빠르게 키워줄 수 있는 방법으로 캐나다 조기유학을 고민하기 시작하셨다.
그때까지 한국의 교육경쟁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어린 나는
맹모삼천지교의 열정과 우리나라의 뜨겁다 못해 과도한 교육열의 현장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리고 순수한 마음에 부모님이 준비하는 게 맞다고 믿었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에 캐나다 밴쿠버 섬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지금의 나처럼 예민하고 날이 서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돌이켜 생각하시기에
' 어렸을 때 네가 너무 순하고 말을 잘 들어서, 거친 세상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었다'라고 회상하실 정도였다.
온실 속 화초처럼 순한 아이로 자라왔던 나는 갑작스러운 도전인 캐나다 생활 첫 한 달 동안 정말 많이 울었던 게 기억난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고, 모두가 공부에 매진하는 것 같은 상황도, 모든 친구들이 나보다 세련된 것 같고,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서울 아이들이란 것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60명 정도가 같이 간 8개월짜리 영어교육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영어 실력은 당연히 꼴등으로 시작했었다.
어린 시골아이였던 필자는 새로운 환경에 첫 한 달 동안 당황하다가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영어를 너무 못해서 60명의 한국인 프로그램에서도 주눅 들어있고, 외국인들이랑 같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대화를 못해 친구 사귀기가 어려우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주변에는 죄다 서울 아이들이라 내가 사투리를 쓴다고 놀리니 사투리를 고치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마음에 장난을 치는 것이었을 듯하다. 당시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안 그래도 체격이 작은 편인 나인데 , 외국 아이들 사이에 끼여있으니 더 작아 보여 키가 크기 위해 줄넘기를 매일 1000개씩 하자는 다짐이었다.
소심했던 시골아이는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 외국인과 소통을 위한 영어공부를 계획하며 8개월의 캐나다 조기유학 도전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건 돌이켜보면 한국의 무한경쟁을 처음 보았던 순간이었으며, 내가 남과 비교해 뭔가 늦었다는 것을 살면서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마냥 피터팬의 네버랜드에 살 수 없고, 그곳을 떠나 스스로 결정하고, 도전하고, 해결하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첫 경험이었다.
또한 나의 숨어있던 특성이 나타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승부욕이 강하며, 꾸준하게 하는 인내심이 나타났던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함을 배웠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