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근데 장소가 레이캬비크 1

by 오늘영

장시간 비행과 경유의 첫 얼굴


여행이 시작됐다. 인천공항에서 비행 출발을 기다리며 나보다 더 들뜬 아빠와 엄마의 통화 목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상세히 올리라’는 말이 귀여웠다. 사실은 나보다 자기들이 더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여행의 들뜬 마음은 다른 이들의 설렘까지 포함되어 비로소 나의 감정이 완성되는 것인가.

티켓을 발권하고, 수하물을 부치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서 면세점코너로 들어와 베르가못 향수를 구매했다. 그 향에 여행의 추억을 담는다는 어느 유명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그 유명인은 감각 중 후각이 발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각이 둔감한 나는 향수보다는 다른 감각에 여행의 추억을 담게 되었으니 말이다) 100달러 이상 구매하면 할인해 준다며 추가구매로 향초를 권유하는 직원에게 ‘제가 앞으로 한 달간 여행을 다닐 거라서요 (무거운 짐은 힘들어요)’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부러워하는 눈빛이 나의 기쁨과 크게 악수했다. 여행의 설렘, 역시 다른 이들의 설렘까지 포함되어 비로소 나의 감정이 완성되었다.


나는 핀에어를 이용해 헬싱키까지 간 뒤 헬싱키 공항에서 9시간을 경유하고, 아이슬란드에어를 타고 레이캬비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인천-헬싱키 반타공항까지 14시간이 소요된다는데, 나는 14시간 동안 앉은 자세로 가만히 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장시간 비행의 쓴맛을 몰랐다. 하.

첫 번째 쓴맛은 난기류였다. 인천을 떠나 동해를 지나는 중 1시간 정도 난기류가 이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이 허공 속에 큰 기계 덩어리에 의지해있는 내 신체가 갑자기 한없이 작게 느껴졌고, 그 상태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래로 몇 번이나 떨어지는 느낌을 겪어야 했다. 아기들은 낯선 환경이 이상했는지 울어댔지만, 어른들은 1시간이 넘는 난기류에도 울지 않았다. 나는 좌석 앞 모니터에 비행경로를 띄워놓고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 위치에서 난기류를 겪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인데, 다른 좌석을 슬쩍 보니 나처럼 비행경로를 보는 몇몇을 발견했다.

어쨌든 일본 상공을 지나면서 난기류는 끝이 났고, 멀미를 할 뻔했지만 첫 번째 기내식을 싹싹 긁어 다 먹었다. 핀에어에서 먹어보는 첫 번째 기내식 놓칠 수 없지. 당연히 와인도 마셨다. 작은 병 하나를 주었지만, 일명 알쓰인 나에게는 잠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와인을 마시고 잠에 든 탓일까. 비행기가 출발하고 4시간 만에 잠에서 깨버렸다. 영화를 2편이나 보고, 그때 보던 중이던 넷플릭스 시리즈도 한 편 보았지만 여전히 6시간 이상의 비행이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겪은 두 번째 쓴맛은 앞 좌석의 압박이었다. 나는 세 좌석이 붙어있는 이코노미에 탔는데, 앞 좌석에 탄 사람들의 의자가 뒤로 최대한 젖혀졌다. 의자도 견딜 수 있는 하중이 정해져 있고, 이미 다들 잠든 상태였기 때문에 나도 의자를 뒤로 젖혀서 공간을 확보해 보았지만, 이미 코앞까지 온 앞 좌석의 압박과 그냥 그 자체로 힘겨운 장거리 비행 탓으로 잠드는 데에 실패했다. 화장실을 두 번 들락거렸고, 비행기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무료 주스 코너에서 오렌지 주스, 크렌베리 주스를 골고루 한 잔씩 마셨다. 내 옆좌석 아저씨도 나와 같은 힘듦이 있었는지, 그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다가 착륙하기 2시간 전 마지막 기내식을 줄 때 자리로 돌아왔다.


장시간비행의 단맛도 있었다. 14시간 비행이 끝나고 승무원이 북극점을 비행했다는 수료증(The Northern route diploma)을 쥐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귀하가 우리와 함께 북극 상공을 비행했음을 증명합니다(We hereby certify that you have flown over the North Pole with us)”


이 항로를 수백 번은 운행했을 항공사의 직원들이 그저 장시간 비행의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나에게 “우리와 함께” 북극을 비행했다고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 문장 뭐야. 이 웅장함 뭐냐고. 동경 127도, 북위 37도의 대한민국에서 벗어난 적 없는 내가 방금 북극을 지나왔다니. 장시간 비행의 괴로움이 싹 사라지는 감동적인 종이 한 장이었다.


헬싱키 반타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5시 30분. 나는 샤워가 간절했다. 한국의 집에서 출발해 핀란드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20시간 동안 씻지 못했던 것이다. 첫 번째로 찾아간 라운지는 오전 10시에 문을 열었다. 두 번째로 찾은 라운지는 샤워룸이 없었다. 아, 정녕 샤워를 할 수 없는 것인가. 오전 7시, 샤워룸 찾기를 포기하고 공항 의자에 몸을 뉘었다. 유럽대륙과 다른 대륙을 이어주는 거대한 국제공항 구석의 조용한 곳이었다. 경험 많은 여행자처럼 굴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꽤 무서웠다. ‘여기서 내가 이렇게 누워있어도 될까.’, ‘내 캐리어를 대뜸 누가 가져가면 어떡하지.’, ‘덩치 좋은 북유럽 사람들이 동양인이라고 나를 무시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이내 걱정은 접었다. 여기는 그냥 공항이고 (심지어 전 세계를 연결하는 허브공항이라고 홍보한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일정한 정도의 약속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는 곧 팔을 들어 머리 밑에 받치고 눈을 감았다.

내가 몸을 뉘인 지 10분쯤 지났을까, 노부부 두 커플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넷은 각자 트래킹 복장이었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뉘앙스, ‘맞다’는 뉘앙스, 낄낄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곧 공항에서 비행기의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넷 중 한 할머니의 가방에서 넷 모두의 비행티켓이 나왔고, 할머니는 그것을 한 명 한 명에게 나눠주었다. 총무 할머니와 나머지 셋은 그곳을 떠났다. 나도 다른 라운지로 샤워룸을 찾아 떠났다.


샤워룸은 핀에어 라운지에 있었다. 입구의 직원에게 ‘샤워만 이용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친절한 직원이 ‘그렇게는 안되지만, 39유로만 내면 너는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밥도 먹고, 와인을 마실 수 있으며, 샤워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39유로면 약 5만 원 정도. 근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니. 북유럽 물가에 대한 편견으로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15분 만에 샤워를 마치고 구석의 편안한 자리를 찾아 2시간을 연달아 잤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백색소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천장까지 난 전면 유리창이 시원했고, 누구도 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면 유리창의 아래에서 1/5 지점은 가로로 쭉 뻗은 활주로로 가득했고, 그 활주로를 지나 핀란드 국적기가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매일 찾는 지겨운 일터이고, 나에게는 북유럽에 대한 첫인상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무민의 왕국이며 마리메꼬의 나라일 수도 있는 곳. 어쩐지 이곳이 가깝게 느껴졌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음식이 차려진 코너에서 누군가 만들어준 따듯한 토마토요리와 빵, 에스프레소를 먹었다.


헬싱키-레이캬비크 항공편 출발과 도착시간은 15:05-15:35였다. 그래서 30분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해 뜨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거니까 그만큼 시간을 앞당겨 이동하는 거’라고, ‘영화에서 말하는 타임워프의 원리를 몸으로 조금 체험한 거’라며 아빠가 설명해 주었다. 무지한 딸은 아빠의 지식을 공짜로 야금야금 뺏어 먹는다.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레이캬비크 케플라비크 공항까지 3시간 30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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