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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Apr 14. 2019

살이 오른 연잎을 보러, 이 곳 선교장으로

여행 소회 (12) -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강릉


여행 소회 열두 번째 글은 사랑하는 엄마의 고향이자 제가 태어난 도시, 속초와 강릉. 그리고 강원도를 위해 씁니다. 가슴 아픈 화마의 기억에서 빠른 안녕을 찾길 기도합니다.



숲에 들어서자, 하얀색 자작이 온몸을 병풍처럼 둘렀다. 숨을 쉬어 보았더니 진짜 숨이 쉬어졌다. 서울의 나는 항상 가짜 숨을 내몰았다. 온 산이 내뿜는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바퀴 돌았다. 산은 높고 커서 그녀를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제 힘을 나눠주고도 여전히 넉넉했고 여유가 있는 풍채였다. 하얀색 자작을 갑옷으로 두른 그녀는 강하고 아름다웠다.



채 열 살이 되기 전 나는 이 숲 근처에 살았다. 그때도 자작나무 숲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겨울이면 꽝꽝 얼음이 얼어 썰매를 타고 놀던 작은 호수를 지나치자 옛 기억이 삐져나왔다. 이 마을에서 나는 여름이면 집 앞마당에서 자라난 옥수수를 시원한 평상에서 와그작와그작 씹어댔고, 키가 크고 노란 해바라기에 얼굴을 들이밀며 언제쯤 씨앗을 까먹을 수 있을까 오매불망 뺏어먹을 궁리만 했다. 친척들이 집에 놀러 오면 뒷산에 뱀이 나온다고 겁을 줬고, 봄이면 개울물에 엉망진창이 되고도 개구리알을 건져내는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런 짧은 몇 년을 이 근처에서 보냈다. 리틀 포레스트는 나에게 영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 어린 날이 딱 그랬다. 그래서 나는 20년을 넘게 살아온 서울보다 단 몇 년을 지낸 강원도를 고향처럼 생각했다.



다음 날이 되자 촉촉하게 비가 내렸다. 더위에 지쳐 떠난 외유라서 비에 열이 식으니 오히려 좋았다.



강릉 고택의 연잎은 물을 머금고 풍성하게 피어오른 채였다. 기와집을 떠받치고 들 듯 기세 등등하게 살이 오른 모습이 보기 좋았다. 300여 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어 여전히 손을 받는 양반집 선교장. 이 곳 연못의 맑은 물이 경포호수로 빠져나간다고 했다.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곳인지 올 때마다 차분하게 마음이 정돈됐다. 배산임수라고 했다. 옛날 것에 오니 옛날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 웃겼다. 깊은 지하로 낸 터널 안에서 철로 만든 기다란 것을 타고 매일 도시를 횡단하는 내게 배산임수가 웬 말이냐 싶었다.



우리는 천천히 선교장 내부를 산책했다. 걷기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비가 내렸다. 나와 동생이 재잘거리는 소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고인 땅에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많은 것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괜히 누군가가 미워서 생긴 생채기가 아물 듯했다.



누군가 아직 낫지 않은 상처가 있다면 오라. 비오는 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연잎을 보러. 이 곳 선교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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