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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Mar 31. 2019

지금은 휴가 중이야

여행 소회 (10) - 싱가포르 01


정말 더웠던 대한민국의 여름. 대프리카 같은 신조어가 생길 만큼 땅이 끓던 날들이었다. 이번 여름휴가는 속 편하게 그냥 집에서 쉴꺼야. 라고 선언했던 나는, 업무 중에 열을 잔뜩 받은 뒤 여자 혼자 가기 좋은 여행지를 대충 검색해서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성수기라 비쌌고 싱가폴이었다.


흔히 그렇듯, 나는 싱가폴을 브랜드가 가득한 오차드거리와 화려한 호텔, 높은 빌딩 쯤으로 상상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눈이 피로해질 만큼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거리를 헤매었고, 호텔은 그 어느 도시보다 잘 지어졌으며 어딜 가나 에어컨이 풀가동되는 건물 천지였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에 콕콕 박힌 검은 바닐라빈 처럼, 도시 곳곳에 열대의 기운을 숨길 순 없었다. 이러쿵 저러쿵한 매력의 강약조절이 심심하지 않은 도시 나라가 꽤 재밌었다


이름도 모르고 주문한 현지식. 해장용은 아니었는데 해장 하는 듯 했다


첫날 이른 오후, 바쁜 오전 일정을 마치고 나는 호텔 바로 옆 다이닝 스팟인 차임스에 갔다. 성당과 수도원 부지를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꾸며둔 곳. 지금 말고 10년도 더 이전에, 조용해서 자주 찾던 예전 가로수길이 생각났다. 방금 데운 바게트에 푸짐하게 속을 채운 샌드위치가 맛집이던 작은 골목. 그때의 가로수길의 감성이 여기 묻어났다. 기분이 살랑살랑, 술 생각이 없었다가 베지테리안 샌드위치와 함께 여기 대표 칵테일인 싱가폴 슬링을 주문 하고 있었다.



날은 많이 덥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흐렸고,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가게 밖에 위치한 정원의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테이블 의자가 높아 발이 달랑거렸다. 익숙한 팝이 들려왔고, 바람은 더 불었다.




붉은 슬링은 기분 좋게 달았고, 샌드위치는 따뜻했다. 지나치게 추웠던 기내에 몸이 좋지 않았는데 노곤 노곤하게 말랑해졌다. 시야에 노모와 산책하는 중년부부가 있었다. 그 순간이 마음에 드는 그림을 만난 듯 참 좋았다. 사람들로 복작거리던 머라이언도, 테마파크의 수족관도 별점 만점을 주기엔 못내 내 별들이 아쉬웠는데, 음악을 실어오던 바람과 슬링, 샌드위치 속에 축 늘어진 가지가 나를 달랬다. 지금은 휴가 중이라고. 얼른 나아 따뜻한 자유를 맘껏 즐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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