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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Mar 13. 2019

나는 그저 안아 들기만 하면 되었다

여행 소회 (1) - 대한민국 제주 01

아침 비행기로 도착한 제주. 공항 근처에서 전복뚝배기로 첫 식사를 마치고 바로 숲으로 향했다. 마침 식목일이었고, 그토록 가고 싶던 숲길을 가기에 이만한 날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나를 그곳에 심어 버리고 싶었다.


여행 몇 달 전, 인턴부터 다니던 첫 회사에서 승진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퇴사를 주변의 만류로 포기하고 갔던 여행. 좋지 못한 에너지를 다 섬에 쏟아버리겠다는 각오로 비장하게 제주에 간 것이다.



숲길은 조용했다. 줄곧 나와 숲만이 숨을 쉬었다. 뿜어내는 기운이 냉정한 신의 호흡 같아 나는 저절로 엄숙해졌다. 마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기분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땅을 밟는 소리마저 지나치게 좋았다.


엉금엉금


새순이 나는 가지에 건너건너 아라크네의 흔적


순간순간이 세례를 받듯 벅찼다


한창 걷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꽤 키가 컸던 수사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감히 가까이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급히 카메라 줌을 당겨 그를 찍었다. 조악한 기술에 작은 카메라라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멋지게 기록하지 못했다고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그가 날 지긋이 쳐다보았던 그 순간이 내게 주어진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듯 도망치듯 혹은 비장하게 제주에 도착한 첫날. 섬은 날 반겨 주었고, 숲은 내가 필요로 한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있었기에 자유로운 두 팔로 그저 숲이 주는 선물을 안아 들기만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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