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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Mar 13. 2019

올레 7코스의 기억

여행 소회 (2) - 대한민국 제주 02


전날 산에 안겼으니 오늘은 바다를 두드리고 싶었다. 비가 촉촉이 내린 뒤였고 날씨는 흐렸지만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강렬한 태양에 지칠 일 없이 실컷 걷기에 좋았다.



올레 7코스에 접어들자 금방 이게 길일까 의심이 가는 해안가가 나왔다. 붉고 푸른 올레 깃발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유혹했다. 나아갔다. 믿었더니 곧 드넓게 바다가 나왔다.



다시 돌더미가 반복되긴 했지만, 아주 못 걸을 길은 아니었다. 신고 있던 나이키 운동화는 엉망이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 이 녀석은 도시를 떠나 신나 있었고 젖은 흙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날, 운동화가 웃고 있었다고 말하면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웃고있는 운동화
우수수 떨어진 동백
길이 없다는 길. 계속 나아갔다.

귤나무만으로 길은 충분히 제주다웠다. 하지만 그것이 부족했는지 섬은 갑작스레 열대우림을 신메뉴로 내게 내놓았다. 하나의 길을 걷는 데 계속 다른 얼굴이었다. 다중인격도 정도가 있어야지.  나는 다른 섬에서 다른 섬으로 옮겨 항해를 계속했다.

역시나 비가 시작됐다. 우산이 있었지만 못마땅해 길거리 작은 구멍가게에 들려 비옷을 샀다. 비가 거세 옷은 젖었지만, 비를 피하기보다는 체온을 유지하는 용도로 썼다. 노란색이 상쾌했다.



나는 서귀포시에 다다르고 있었다. 유토피아로. 자유로이 걷고 또 걸었다. 어떻게 제주시 노형동의 숙소로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택시는 아니었으니, 아마도 버스였을 것이다.



하루 종일 길은 고됐고 길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해 갔던 길이기에 두 다리는 금세 지치지 않았다. 유토피아로 향한 이 날의 걸음은 고작 3만 보. 하지만 그 뒤로 몇 년간 나는 이 날, 올레 7코스의 기억을 꺼내어 다시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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