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멈추게 한 시, <연필을 깎으며>_이해인
연필을 깎으며
이해인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한때는 매일 연필을 깎고 필사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연필을 예쁘게 깎으려 할 수록 연필은 더 빨리 작아졌다. 글을 쓰기에 충분한 흑심이 나왔음에도,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깎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연필은 훌쩍 줄어 있다.
오늘 우연히 이해인 시인의 <연필을 깎으며>를 읽게 되었다. 그러자 괜스레 연필을 다시 쥐고 싶어졌다. 언제부턴가 샤프와 볼펜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면서, 연필과는 조금 멀어져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시인이 말한 '세월의 칼'에 나라는 연필이 조금씩 깍여온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연필을 천천히 깎아 이 시를 사각사각 써내려가 보려고 한다. 더는 예쁘게, 깔끔하게 깎아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깎이고 쓰이며 나만의 흔적을 남기는 것,
그것이 어쩌면 'Unique'한 삶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