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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항해, 지중해 어딘가에서

지중해 유람선 여정기 

by 오뉴 Nov 2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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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는 즐거우십니까? 잔잔한 계절이라 해도 파도가 들이칠 때면 새삼 자연의 힘을 실감하게 됩니다. 참, 간밤엔 괜찮으셨나요? 자정쯤이었나, 곧 기울어질 것처럼 세차게 배가 흔들렸는데. 제 방에선 침대가 몇 센티 밀려 움직였다니까요, 글쎄. 주무시느라 몰랐다고요, 정말입니까? 저는 이 나이에 이불 머리끝까지 올리고 주먹까지 꽉 쥐었는데 말입니다. ‘새까만 밤 그리고 망망대해에서 이 배 하나 가라앉아도 누구 하나 알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무섭던지요. 


갑판 위에서 해 뜨는 풍경을 보니 살았구나, 안도감이 듭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어요. 실례가 아니었길 바랍니다. 크루즈에서 젊은 사람 보기가 쉽지 않은 일이잖습니까. 게다가 동양인 청년은 이 배에 탄 수천 명 중 유일할 테고요. 그런 분이 홀로 새벽녘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이 무언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더군요. 묻지는 않겠습니다, 무례는 조금 전 인사로 충분하니까요.



| 나아가다, 만나고 사랑하다! 

하루 한 도시, 인생을 닮은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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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주변을 보세요. 사방으로 바다뿐인, 어느 대륙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의 망망대해. 요 며칠, 이 막연함을 즐기다 보니 사람의 삶이라는 게 항해와 닮은 구석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괜찮다면 제 생각을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살면서 늘 했던 질문이 있다면 내게 허락된 시간 중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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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앞날이 구만리 같던 젊은 날에도 하루아침에 떠난 친구 소식에 겁먹으며 내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제 남은 친구, 자식들과 내가 떠난 이후의 시간에 대해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나이가 됐음에도 스스로는 지난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그럭저럭 건강하게 삽니다. 이렇게 시간을 가르고 나아가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어떤 일에 가슴 뛰어 보기도 하고. 우리가 그간 거쳐 온 스페인과 영국의 도시들이 꼭 그렇지 않던가요. 엊그제 찻집에서 만난 신사는 작년에 부부 동반 티켓을 샀지만 그 사이 부인이 긴 안식에 드셨다더군요. 아쉽지만 그녀의 항로는 거기까지였나 봅니다. 그래도 홀로나마 배에 올랐다는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간 멋진 항해를 하셨으리라.



| 330미터, 19층, 3560명! 

바다 위 호텔에서 보내는 하루

ⓒ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그나저나 오롯이 바다 위에서 보내는 하루라, 문장으로 옮기니 꽤 설레는 일 아닙니까. 매일 자고 나면 다른 도시에 도착해 하루씩 여행한다는 게 편하고 좋습니다만, 저처럼 미련이 많은 사람에게는 꽤 숨찬 일이거든요.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데 헤어져야 하니까, 곱씹을 새도 없이 다른 도시에 정붙여야 하니까. 그래서 지브롤터(Gibraltar)에서 제노바(Genoa)까지 가는 이 하루가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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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저기 보이는 갑판 위 수영장에서 몸도 좀 녹이고 선베드에 누워 낮잠도 자고 싶군요. 저녁엔 부인과 근사한 식당에도 한 번 가 보려고 합니다. 아아, 크루즈 내부의 식당에 등급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요? 어깨에 걸린 카메라를 보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바깥 구경에 여념이 없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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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주 작가



식당은 세 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누구나 내킬 때 가서 식사할 수 있는 14층의 뷔페. 물값만 내면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는 6층의 중급 식당. 음식값을 지불하는 5층의 고급 식당. 제가 찾아본 곳은 이렇습니다. 재미있죠, 한 번쯤 즐겨볼 만하지 않습니까. 


말이 나왔으니 오늘 하루 선내 시설을 즐겨 보시는 건 어떨지요. 도시도, 바다도 아름답지만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도 꽤 근사하니까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니 꼭대기가 19층이던데 이 정도면 바다 위에 떠 있는 호텔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오늘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수가 약 3,500명. 배 안에는 식당과 카페, 술집은 물론이고 면세점과 미술관, 카지노도 있으니 둘러보시죠. 4층에는 스파, 12층에는 웨딩홀도 있답니다. 바다 위에서의 예식이라, 부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습니다. 참, 턱시도는 챙겨 오셨죠? 승선할 때 들으셨던 선상 파티가 오늘 저녁입니다. 바다 위에서의 하루를 만끽하시고 그때 뵙죠.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분명 저는 그쪽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 성공적인 항해를 위해, 다 같이 건배

ⓒ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젊음도 젊음이지만 옷차림이 분명 다를 거라 생각했거든요. 까만 턱시도와 드레스들 사이에서 베이지색 슈트가 단연 눈에 띕니다. 거기에 나비넥타이까지. 승선을 앞두고 바르셀로나에서 급하게 사셨다고요. 잘하셨습니다, 격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것도 파티를 위한 준비물 중 일부이자 즐거움이니까요. 이렇게 중앙 홀에 모두 모이니 정말이지 대단한 인파입니다. 창밖을 내다보지 않으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도 모르겠어요. 망망대해 위에서 이렇게 우리끼리 즐기고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합니다. 이러다 갑자기 배가 가라앉기라도 한다면? 하하, 그만하겠습니다.



ⓒ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조금 전에 밴드 공연이 끝나고 높이 쌓인 와인잔들을 가렸던 베일이 벗겨졌습니다. 곧 선장이 나오고 건배사를 외치겠죠. 아직은 서로 사진 찍으며 파티 분위기 즐기느라 여념이 없지만요. 참, 바다 위에서의 하루는 즐거우셨습니까, 도시를 탐미하지 못해 아쉽진 않으셨는지요.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까만 연미복을 입은 선장이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어서 저기 있는 잔을 가져오세요.



ⓒ 김성주 작가ⓒ 김성주 작가



건배가 끝나면 여기 모인 사람들 한 명씩 쌓여있는 와인잔에 술을 부을 겁니다. 따로 일행이 없다면 오늘은 저와 함께 가시죠. 서로 다른 항로를 거쳐 왔지만 오늘 이렇게 하루나마 함께 항해한 것도 특별한 인연이니까. 자, 우선 건배를. 앞으로의 항해도 성공적이기를, 위하여!


이 글은 여행 포토그래퍼 김성주 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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