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 9
가장 무해한 도피처
작년 이맘때 쓴 일기를 보았다. 마지막 앨범의 타이틀곡이 시상식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날이었고, 아이들은 마지막 앨범의 콘셉트를 살려 2년 동안의 활동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무대들을 선보였다. 쉬지 않고 활동하고, 하나하나 발전해서, 지금과 같이 성장한 모습을 보고 있다니 정말 감회가 남달랐다. 한편으로 나 스스로 2년간 무엇이 변화했고 성장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고.
나는 덕후로서 성장했다. 그것은 확실했다.
일전에 나는 무언가를 쉽게 '판단' 하는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자꾸 의심하고, 만족을 모르는 편이었다. 그러나 덕후로서 누군가의 사소한 부분까지 귀엽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뭔가 한 사람을 아낌없이, 대가 없이 응원하는 그런 마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과 다른 점
덕후 생활에 가장 큰 현타가 온 후 아이들이 다시 돌아온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같은 내 안의 감정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이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유해한 인간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상대에게 상처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자극적으로만 소비하는 부류들과 나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왜 아이돌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의 최애를 응원한다. 최애가 가진 수많은 장점 중에서도 '본업'-노래와 춤, 특히 무대에서의 퍼포먼스-을 잘하는 모습을 사랑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아이돌 덕후들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신은 칭찬일까
아이돌 이란 직업은 이름 그대로 한 사람을 인간이 아닌 자리에 올려놓는다. 사생활은 감춰지고 만들어진 완벽한 존재로서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 아이돌, 그중에서도 걸그룹은 더 큰 책임감과 무결점을 요구한다.
언제나 요정이나 여신 같은 모습으로,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생명체. 그러면서도 상냥하고 친절해야 한다는 그런 태도들. 이제는 줄어들긴 했지만, 예전엔 걸그룹에게 "애교"를 시키는 게 당연한 관례였다. 하나의 재능 인양 애교를 보여줘야 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의 책 <여신은 칭찬일까> 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요정은 남녀 불문하고 '장인'이나 '달인'처럼 한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데, 아이돌과 팬덤 문화에서 용례를 찾자면 '엔딩 요정'(무대 엔딩에 카메라에 잡힌 멤버)이 있다. 이런 의미의 요정 또한 미사여구일 뿐이니 과민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점이다. '요정이 된 소녀'는 통상적이고 관념적인 소녀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소녀는 여성이자 여성이 아닌 존재이고, 취약하고 순진하지만 이상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지칭하는 워딩을 가지고 크게 생각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칭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을 외적인 모습을 기준으로 요정과 여신 등으로 대상화, 타자화 시키는 것이며 이런 숭배는 결국에는 주체성을 상실시킬 수 있다. 나 스스로도 내 최애를 요정이니, 천사니 하면서 불렀던 것을 반성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할지라도 문제의식을 가져야 변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 아이돌의 외모는 중요한 매력 요소이지만 그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직접 작곡 작사에 참여한다거나, 춤과 노래 실력을 보여주는 콘텐츠들(커버곡이나 퍼포먼스 등)이 많아지고 있다. 팬들이 변했고, 사회의 인식이 변했고, 케이팝 산업이 변했다.
결국은 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산업을 움직이는 것은 소수의 대형 기획사들과 그들의 결정권자들이지만, 덕후들의 힘으로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최애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재능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덕후 하나하나의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