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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Mar 24. 2022

엄마에게 퇴사한다고 말했다

장투하듯 삽니다 - 2

"엄마, 할 말이 있어."

퇴사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가장 말하기 어려웠던 사람. 결국 엄마에게 말해야 될 때가 왔다.


K-장녀의 슬픔

유독 내 친구 중에는 장녀가 많다. 같은 K-장녀끼리 자석처럼 끌리는 것이 있어서 일까?

한국의 장녀, 우리 K-장녀들은 '전통적으로' 책임감을 유전자에 새기고 태어난다. 누가 시키지 않았더라도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지방 대도시에서 장녀로 태어나 19살까지 보냈다. 요즘엔 '평균' '평범'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사회가 정한 교육제도 하에 튀지도 모나지도 않았던 10대였다. 운이 좋게도, 집안이 흔들릴 정도로 경제적 위기가 닥친다거나, 당장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십 대를 보내고, 다양한 삶의 변주를 겪었던 이십 대를 보냈다.


남들이 생각하는 '정상성'의 루트, 크게 말썽 부리지 않고 적당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는 그런 삶을 당연스럽게 여겼다. 분명 고개를 돌렸다면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테지만, 내 길에는 없었고 설령 그것이 나에게 주워졌다고 한들 그건 나의 몫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 때려치우고 싶다. 아 회사 가기 싫다. (일요일엔)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6년이 넘는 시간을 한 회사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회사 자체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좋아했던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하기도했고 드물지만 가끔은 보람도 있었다), 모범생 K-장녀 기질 때문이라 확신한다.

첫 번째 회사에서 다음 회사로 이직을 할 때도, 중간에 갭이어를 갖는다든지 다른 삶의 방식을 꿈꿔본다든지 하는 것도 고려해볼 법했지만 역시나 선택지에 없었다. 이직을 하기 위해 소홀하지 않게 준비했고, 이직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하면서 1년 반을 보냈다.



퇴사 할 결심

퇴사를 결심하고, 동생과 친한 친구들과 동료들에게는 나의 결정을 알렸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유독 엄마에게는 말하는 것을 미루었다. 이사와의 3차로 이어지는 면담을 끝내고 대표와의 이야기도 최종 마무리가 되었을 때에야, 그제야 엄마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진짜 확정 짓는 느낌이었다. (졸지에 엄마가 퇴사 퀘스트의 최종 보스가 되어버렸다)


사실 몇 달간 퇴사를 고민하던 때는 왠지 모르게 엄마의 전화는 피했다. 엄마와 통화를 하면, 그만두겠다는 마음이 흔들리지않을까하는 겁쟁이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한 직장에서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근무하면서 우리 자매를 키워온 베이비부머 세대인 엄마가 과연 나의 선택을,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자발적인 백수의 삶을 이해해줄 것인가? 에 대해서 의심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엄마라면 아마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 지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퇴로가 없을 때, 엄마가 다시 마음을 바꾸라며 설득을 하여도 돌아갈 길이 없을 때까지 그 말을 미루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엄마는 친구들에게 첫째 딸 얘기를 했을 때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더 이상 믿음직한 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못을 박는 것이었기  때문에, 엄마를 실망시키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이건 엄마에 대한 실망인지, 나에 대한 실망인지 조금은 헷갈리기도 했다.


엄마는 전화를 피하는 나를 보면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동생에게 물어보기도 한 모양이었다. 역시 엄마의 직감이란. 동생은 언니가 말할 때까지 좀만 기다릴 거라고 말했다고 했다.  



엄마에게 퇴사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결전의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앉자마자 랩을 하듯이, 땀에 젖은 옷을 급하게 벗어던지듯이 말했다. "나 퇴사하기로 했어."


원래 계획은 일목요연하게 왜 퇴사를 하려는지, 왜 여기는 답이 될 수 없는지, 그래서 이직도 하지 않고 무엇을 할 계획인지 등을 설명하는 것이었으나... (역시 나란 인간은) 퇴사하겠다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며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코를 먹고 울면서' 이야기를 했다. 하하하.


놀랍게도 엄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탓인지, "네가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니, 이해한다" 고 말했다. 반대하지도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회사에서 너를 붙잡으면서 하는 무엇을 제시했는지를 물어보더니 알겠다고 했다.


너무나도 쿨했다. 우리 엄마가 개방적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쿨하다고? 베이비부머보다는 회사를 오래 다닌 선배로서 공감을 했던 걸까? 그동안의 나의 걱정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엄마에게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펑 뚫린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실감했다.

나 정말 퇴사하는구나.


그날 저녁 엄마가 해준 무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고 푹 잤다. 왠지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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