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두고 머지않아, 동생도 전직을 하겠다며 회사를 나왔다. 정년 퇴임 전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엄마는 백수가 된 두 딸에게 매우 곤란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쩌다 보니 모두 백수
내가 회사를 다니던 8년 동안에는 엄마도, 가끔은 동생도 회사를 다녔다.
엄마는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회사를 다닌 성실한 베이비부머 세대였고, 독일에서 살다코로나 이후로 귀국한 동생 또한 몇 번 이직은 했으나, 최근엔 일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박차고 나와버린 난 엄마 앞에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수준도 안된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자유로운 운명을 즐겼던 동생에게 나는 끈기있는 모범생 언니지만.
일에서는 엄마>나> 동생으로 이어지는 나름의 서열이 있다.
그간 4대 보험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취업을 하기 전엔 엄마에게 소속되면 됐고, 취업이 된 이후에는 회사가 내줬으므로. 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 보통은 엄마 밑으로 들어가면 됐지만, 나한테 속해도 됐다. 엄마가 퇴직할 경우 나에게 소속되면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직장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자유인을 선언하며, 회사를 나왔고 엄마는 얼마 전 인생의 거의 절반을 보낸 회사를 정년 퇴임했다. 동생은 작년 말 회사를 나와 전직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졸지에 온 가족이 백수가 되어버렸다. 참 중간은 없는 가족이다.
퇴사라는 나비효과
사실 이건 예상치 않았던 나의 퇴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퇴사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였다. 엄마의 정년퇴임이야 정해져 있던 것이고,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회사를 꾸준히 다닐 것 같던 첫째가 의외의 선택을 하면서 장르가 바뀌어버린 것이랄까. 나의 퇴사가 가족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나비효과가 되었다. 나야 몸뚱이 하나뿐이니 사실 4대 보험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엄마에겐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지만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달라졌을 거 같지 않지만 ;))
엄마는 그런 첫째 딸이 답답할 법한데, 퇴사하겠다고 고백한 이후 듣기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한두 번 정도 '요새 뭐하고 사냐. 뭐할 계획이냐.' 넌지시 물어본 게 끝이다. 내가 엄마라면, 과연 아무런 소리도 안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걱정이 되어서 한마디를 보탤 것 같은 느낌인데 역시 엄마는 엄마답다 싶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조언을 구하지 않는 이상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으므로.
아, 물론 음식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우리 몸에 관련된 것이며 조언들은 원치 않더라도 감당해야했다. 다 우리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실 '잔소리'라고 생각한 적은 그다지 없다.
엄마는 아마도 자식인 나보다도, 내 안의 K-장녀 의식 혹은 모범생 기질을 믿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하하. 과연..?
엄마의 재취업
가족 중 가장 먼저 백수에서 벗어나는 것은 놀랍게도 엄마일 것 같다.
엄마는 퇴직한 회사에서 곧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정년 퇴임하자마자, 다시 시작이라니 역시 베이비부머들!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도 좋은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 한다고 응원을 보냈다. 모두 다 엄마의 능력 덕분이므로, 축하해줄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생도 전직을 위한 교육이 올여름에 끝나면 취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최후의 1인은 내가 당첨될 것 같은데. 작년 이맘때라면 아마 '상상치도 못했던 전개 ㄴ(°0°)ㄱ '가 싫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