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투하듯 삽니다 - 17
일하려는 베이비부머와 일하지 않으려는 밀레니얼
우리 엄마는 베이비부머 세대이다.
엄마의 회사 동기들이나, 친구들 얘기를 듣고 있으면 흠칫 놀랄 때가 많은데 정년퇴임을 한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일을 구해서 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비부머의 자식들(나 포함)이 더는 못해먹겠다! 싫어하는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며 온갖 궁리를 하는 와중에, 베이비 부머들은 스스로 일을 찾아 한다. 뒤늦게 자격증을 따거나, 은퇴 전 하던 일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한다던지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들이 일을 하는 것은 금전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일을 하지 않는 스스로가 너무 어색하기 때문에, 평생 일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이 가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은퇴 후의 엄마의 삶
엄마는 작년부터 안식년에 들어가서, 얼마 전 정년 퇴임을 하였다. 3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이제는 정말로 일을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은퇴'라는 정의에 걸맞은 은퇴라고 해야 하나.
엄마 말에 따르면, 빠른 년생이라 학교도 일찍 들어갔고 출생신고도 1년 후에 한 덕분에(?) 사실상 동년배들보다도 2년 정도를 더 번 셈이라고 한다. 아마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직군으로는 회사에서 가장 오래 다녔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퇴사하고 무엇을 할 것 인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특별하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큰 그림은 없었고, 영미권 나라로 짧은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고 답했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외국을 나가는 것이 어려워져, 엄마의 유일한 계획도 당장 시행하기는 불가능해졌다.
엄마는 그 대신 꾸준히 루틴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을 택했다. 매일 하던 스트레칭을 더 여유롭게 아침부터 시작하고, 점심은 일주일에 2번 정도 근처 식당에서 먹으면서, 오후에는 카페에 간다. 몇 년간 하고 있는 필라테스도 일주일에 2번 간다. 수요일마다 도서관을 가고, 저녁엔 주로 요리를 해서 먹는다. 친구들과도 주기적으로 만나고, 때로는 여행을 간다.
엄마의 요리 성장기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를 느끼는 것은 요리인 것 같다. 요리 유튜버 몇 개를 구독하면서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요리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최근엔 멸치 꽈리고추볶음이나 오징어찌개 같은 난이도 있는 집밥도 해낸다. 사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할머니가 해주는 요리만 먹었고, 중학교 이후로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둘째 이모가 해주는 밥을 먹었다. 엄마는 주말이나, 명절에만 요리를 했었는데... 엄마의 요리는 미안하지만, 맛이 참... 없.. 었다.
엄마에겐 요리할 여유도 없었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기엔 다른 신경 쓸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일요일까지 학교에서 자습을 했다. 학기 초반에는 대부분 도시락을 싸와서 먹어야 했다. 친구들과 모여서 먹으면 가정주부인 엄마가 있는 아이들의 반찬은 남달랐는데, 나의 경우 자주 가져가던 메뉴는 김치볶음밥에 해물경단이었다. 내가 잘 먹기도 했거니와 어떻게 하든 무난한 맛이 나왔기에 주말 아침에 시간을 들이지 않고 만들기에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냥 사 먹었으면 되는 일인데, 엄마는 평일에 일하고 주말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요리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관심이 없고, 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건지 엄마도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최근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일 택배로 꽝꽝 얼린 육개장이 도착한 것이다. 거기에 온갖 반찬들까지 같이. 서울에 10년이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꾸러미(?)였다. 이것이 미디어에서 많이 보던 '시골에서 보내온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반찬 소포' 인가? 엄마는 얼마 전 유튜브를 보고, 육개장에 도전해보았다면서, 자신의 것을 만드는 김에 우리에게도 보냈다고 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보내냐'며 괜히 번거롭게 그러지 말라고 얘기를 하려다가, 동생과 나는 엄마가 즐거웠다면, 엄마가 행복했다면 됐다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겠다고 했다. 두 덩이 중 한 덩이를 냉장실에서 반나절 녹이고 다시 뜨뜻하게 끓여먹은 육개장은 상당히 맛있었다.
나는 아마 엄마를 닮았으니
처음에는, 수십 년을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살아온 엄마에게 갑작스럽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큰 숙제인 듯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가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 점이 보기 좋고,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를 꾸준히 끈기 있게 하는 것은 그래도 좀 닮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아직'이지만 그냥 하루하루를 잘 보내보려고 한다.
엄마는 우리의 주입식 교육 때문인지(아니 꼭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당장 일할 계획은 없는 것 같았지만, 결국 조만간 전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결국, 엄마도 못 말리는 베이비 부머였던 것이다. 놈팡이 백수 딸은 어른들은 대단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장난) 그들의 성실함에 리스펙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