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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Apr 15. 2022

퇴사 전과 후의 멀티버스

장투하듯 삽니다 - 9

퇴사 전과 후의 멀티버스

퇴사 후에 달라진 것을 꼽자면, 어딘가에 메이지 않는 절대적인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과 주변의 새로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여유가 없어 무감했던, 여섯 번째 감각을 이제야 깨달은 느낌마저 든다. 억눌린 감성 세포를 개방하는 것이 퇴사 후 목표 중 하나였는데, 어느 정도 실현은 된 것 같다. (가끔 너무 감성적이 되어서 주책이 되는 것은 문제다.)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나니. 자동적으로 주변 변화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회사를 다닐 때도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에 없었던 게 아니지만, 그땐 주변을 볼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젠 작고 사소한 것들이 크게 다가온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실감하고 있다. 꼭 멀티버스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퇴사 전의 나'와 '퇴사 후의 나'가 각자 다른 평행우주에서 존재하다가 비로소 만난 느낌이랄까.


고양이와 따릉이

최근에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집 앞 공터의 고양이들이다. 얼룩이, 검냥이, 치즈 총 3마리인데, 가장 늦게 등장한 얼룩이가 사실상 터줏대감처럼 매일매일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해서 동네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다가가도 여유롭게 누워있다. 조심스럽게 만지면 가르랑 거리면서 배를 까고 눕는데 '개냥이'보다 진짜 '강아지'에 가까운 녀석이다. 얼룩이 전에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검 냥이도 친절하고 대범한 친구였는데, 이제는 얼룩이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얼룩이의 부상을 보며 동생은 얼룩이를 '엄석대'라 이름 지었고, 우리는 그 녀석을 석대라고 줄여서 부른다. 왠지 짠해져서 요샌 검 냥이에게 정감이 간다. 츄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야 하나.


동네 고양이들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게 된다. 고양이마다 각자의 출몰지역이 있고, 인간은 느끼기 힘든 그들만의 영역이 있는 것 같다. 신기한 세계다.


낮에는 주로 카페에 간다. 주로 이용했던 대학교 앞 카페가 개강 후에 붐비는 바람에 매일매일 새로운 카페에 도전해보고 있다. 날이 풀린 이후부터는, 따릉이를 타고 조금 멀리 가본다. 따릉이 정기권을 끊은 이후로는 서울숲을 가로질러 근처 카페에 갔다가 돌아온다. 평일 한낮 카페에 가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다.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카페에 와서 머물다가 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면, 삶이 다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2시~3시쯤이 가장 피크이고, 4시가 지나면 점점 사람들이 빠져나가 6시쯤 되면 한가해진다. 내가 카페를 떠나는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던 시간에, 따릉이를 타고 석양을 가로질러 집으로 달린다. 퇴근길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 다른 색깔로 칠해진 느낌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나쁘진 않아서 그 묘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온다.


오늘도 계획했던 것만큼 못했네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럼 어때?

만약 밀린 회사일이 있었다면 찝찝한 마음으로 인해서 계속 신경쓰였을 것이고, 야근이나 주말근무각을 재고 있었을 것이다.


퇴사 후에는 조금은 관대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나는 모두 '나'라는 것을 인정해보려한다. 지금은 그냥 흘러보내도 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라도 응원을 해줘야지, 누가 해주겠나. 스스로를 용서하는 마음을 매일매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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