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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Apr 08. 2022

퇴사 증명서

장투하듯 삽니다 - 6

"증명할 수 있는 서류 있으세요?"

퇴사를 하고 나서 후회한 적이 있냐고 누가 묻는다면, 딱히 없다.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아직까지는 괜찮나 보다  다만, 퇴사를 하고 좀 불편했던, 그래서 조금 슬펐던 순간은 있었다.


'회사원'이 아니라 '기타'

바야흐로, 퇴사하고 두 달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혜택이 있어서 한동안 고민하던 카드가 있었는데, 발급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온라인으로 신청을 했다. 그간 신용카드를 만들 일이 생기면, 따로 확인해야 할 필요 없이 정말 연중무휴로다가 열 일하는 카드사 덕에, 하루 이틀이면 카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발급해줄 테니 어서 돈을 쓰시오 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질 정도였달까.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평소대로 그냥 빠르게 되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걸. 계속 홀딩이 되더니 급기야 이틀 뒤쯤에 전화가 왔다.  

'회사원'이 아니라 '기타' 였던 게 문제였다. 상담원 분은 '고객님의 소득이 증명이 되지 않으므로, 다른 서류 제출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일을 전혀 안 하고 있는지, 본인 소유의 집이나 자동차가 있는지, 사업자가 있는지 등을 물어봤다. 나는 나 아니요, 아닌데요 를 반복하며 왠지 주눅이 들게 되었는데, 카드회사에서 보기에는 그들의 기준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대책 없는 백수였기 때문이었다.


카드를 못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 최후의 보루라도 되듯이 그간 보험금을 꾸준히 일정 금액 이상 냈다면 그것으로도 증빙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가입해 있던 실손보험을 떠올렸고, '보험을 꾸준히 냈으므로' 신뢰가 증명이 됐는지, 그 보험 내역서를 보낸 후 결국 카드 발급이 되었다.



신뢰의 기준

그 며칠간의 과정을 기다리면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 나는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퇴사를 하고 나니, 수년 동안 따박따박 세금을 내고 은행에 저금을 했던 과거는 현재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내가 어디에 속해있고, 얼마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내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즉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준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신원 보증'의 개념은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입장에 놓인 기분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디 소속되지 않더라도,  모범납세자 혹은 성실한 은행 이용자라면, 그간의 관계를 봐서라도  퇴사 이후에 일시적으로 프리패스 같은 걸 해줄 수는 없으려나. 당연히 절대 안 해주겠지~

지금과 같은 보수적인 중앙은행 중심의 구조에서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앞으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탈중앙 금융(Defi)이 대중화되면 그런 신용의 기준은 좀 달라질지도.


그 일을 겪은 뒤, 그즈음에는 지나간 선배들의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이 사무치게 생각났었다. 예를 들어 "그래도 큰 회사에 있을 때 마통 뚫어놔" 같은.



퇴사 증명서

결국 모든 것은 증명의 연속이었다. 그간 사회에서 모든 증명은 회사가 해주고 있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로,  자체로 증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란  알았다. 결국,     먹여 살릴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필요하다는 것을 한번  느꼈고.


비록 금융기관 기준에는 형편없지만, 나 자신의 기준에는 부합하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내가 어떤 것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나만의 온전한 선택들로 이루어진 하루를 보내는 것은 나에게 선사하는 증명이다. 퇴사했기에 가능한, 퇴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행위들을 하며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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