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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Apr 05. 2022

퇴사 후 먹고사는 건에 대하여

장투하듯 삽니다 - 4

퇴사 후 먹고 사는 건에 대하여

"뭐하고 지내?"

퇴사를 하고 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동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다음 이어지는 골질문은 이거다.

"안 불안해? 소득이 없잖아."

나같아도 궁금했을 그 질문. 친구들 중에서도 퇴사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떻게 먹고 사는지 알고싶은 것이다.


당연히 불안하다.  돈 안 벌고 그냥 몇 달을 놀고 있는데 하하하핳... 아직 경제적 자유는 저 멀리 있고 내가 포기한 월급을 모으면 적지는 않은 돈인데 말이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돈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을 포기하면서, 내 일말의 존엄성을 지켰다.


Sibal 비용이여, 안녕

퇴사 후 가장 크게 바뀐 것이 있다면 돈에 대한 태도다.

불필요한 소비를 거의 하지 않는다. 회사를 다닐 때도 가계부를 쓰고 수입에 비해 과한 소비를 하지 않았지만, 술 구매 비용들(바깥에서 먹거나 집에서 먹거나)부터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지 하며 쓰던 외식 비용 그리고 결정적으로 열 받을 때마다 구입하던 상당한 규모의 충동 비용(a.k.a. Sibal 비용)들이 많았다. Sibal 비용에는 게임기 같은 전자제품, 옷, 가방 같은 물건들도 있었고 현타는 주기적으로 왔기에 빈번하지는 않지만 규칙적으로 쓰고는 했다. 이제는 나를 위로하듯 쓰는 소비가 필요 없어졌다. 더 이상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취준생 시절에는 정말 돈을 벌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나 과외로는 충당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월급을 받아서 엄마에게 용돈도 주고 당당하게 돈을 쓰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렇게 돈을 벌고 모으고 나니, 수많은 직장인들이 느끼는 월급의 무게에 짓눌려버렸다. 나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월급의 달콤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재미, 자아성취의 즐거움을 위해 일을 할 거야라고 합리화했지만 사실은 돈도 컸다.


퇴사하고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 거침없이 돈을 쓰진 못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보고 돈도 안 벌고 있는데 뭔 지출이냐며 밥을 사겠다고 하면 한사코 말린다. 엄마도 이제는 연금생활자가 되었으면서;; 가장 민망하고 미안한 순간이다.


백수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끼지 않는 비용은 있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비용 : 가족, 친구 선물

나의 몸과 정신의 건강을 위해 쓰는 비용 : 책, OTT 구독비, 카페(커피)

이 두 가지 기준을 최우선으로 삼고 지출하려고 한다.


소비를 하는 데 있어서 확실히 신중하게 살고 있지만 식료품 비용은 줄이기 힘들다. 불필요한 외식은 자제하고 집에서 주로 해 먹고 있는데도 점심 저녁 두 끼를 모두 집에서 해결해야 해서 항상 일정 금액 이상 나간다. (점심은 많이 먹으면 졸리기도 하고 간단하게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고 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 여파로 식료품 가격이 올라간 까닭에 앵겔 지수가 너무 높아졌다...


새로운 아이디로 로그인!

퇴사하기 전에는 '회사에 소속된 나' 로서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무엇보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얻는 성취와 인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모범생으로 사회적인 기준에 맞춘 길을 가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정석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곁에 두었다. 나는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보호받았다. 물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예술가들이나 사업가들, 프리랜서들의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으나 나와는 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 상상력에서 허용하는 변화는 산업군을 바꾼 이직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것을 할 에너지는 없다는 가장 큰 변명거리가 있었으므로, 회사를 다니면서 N 잡을 갖는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 선을 그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퇴사를 하고 한 걸음 떨어져 나와 삶을 보내다 보니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똑같은 관심사의 영상만 보다가, 정말 새로운 아이디로 로그인한 셈이다.


물론 이렇게 '쓰고만' 살 수는 없다. 아직 정확히 무슨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기웃거려본다.  만약 이런 계획들이 헛발질로 결론이 난다면 또다시 회사에 들어가 돈을 정기적으로 벌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일정량의 월급을 포기하고 얻은 지금의 자유가 나는 너무 좋다.


투자를 위한 경제공부, 블록체인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월급을 가지고 남들이 한다는 재테크는 조금씩 끄적거렸고, 작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했는데, 진짜 투자 공부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한 것은 퇴사하고 나서부터다.

여전히 잘 모르지만, 쪼쪼 렙에서 쪼렙 정도로는  레벨업 한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일해서 소득을 얻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보통 목표를 정하면, 비슷하게라도 가고는 했으니 이렇게 정해놓고 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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