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뛰려고요
"퇴사하고 뭐 할 거예요?"
"저, 뛰려고요."
퇴사를 하고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열심히 뛸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 퇴사 시점에는 무엇을 할지 생각을 안 하기도 했거니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건강에 까지 도움이 되는 것이 러닝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뜀박질 역사를 보자면, 나는 단거리 파였다. 체력검사시간(지금은 이런 체력장이라는 것을 하는지 모르겠다)에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 항상 뒷번호로 돌아왔다. 달리기라는 건 빠르게 끝내고 이기고 싶지, 참고 버티면서 오래도록 하고 싶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장거리 러닝을 꾸준히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다가 러너
"그 지루한 걸 어떻게 해?"
내 동생은 거의 10년 가까이 꾸준히 뛰고 있는 성실한 러너다. 본인은 한 가지를 오래도록 하는 것에는 재능이 없다고 자조하지만, 러닝에서만큼은 완전 인정할 수 있다.
러닝을 시작한 것은 작년 봄이었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또 한참 무기력증에 빠져있을 때라 챌린지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해보지 않았던 목표 같은 것을 세우고 싶어 선택한 것이 러닝이었다. 러닝을 하고 있는 동생을 따라 주말에 뛴 것이 시작이었는데, 처음엔 거의 1-2분 남짓 뛰다가 너무 힘들어서 제발 좀 쉬어가자고 읍소를 했더랬다. 그러면 동생은 "언니, 쉬면 안 돼. 힘들어도 걸어야 돼" 라며 트레이닝했다. 아 이거 역시 쉬운 게 아니네 하고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초심자들이 한다는 러닝 앱을 추천받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2-3분 걷고 쉬다를 반복하다가 나중엔 15분, 20분, 30분까지 연속으로 뛰게 되는, 단계별 퀘스트를 깨서 레벨업을 하는 게임 같은 것이었다. 결국 도장 깨듯이 하나하나 이루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단계까지 도달했고 이제는 4-5 km 남짓이지만 집 근처 강가의 트랙을 왕복할 정도는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러닝을 시작했지만, 결국 회사일을 잘 해내기 위한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뛰었던 것 같다. 평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될 정도'로,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운동을 했다. 러닝에서 얻은 에너지를 스트레스와 무력감을 잘 버티기 위한 원료로 태웠던 거다.
하지만 작년 가을에 퇴사를 하고 나서는 구애받지 않고 매일매일 하천을 뛰었다. 날씨가 좀 추워도 뛰다 보면 몸이 데워져 추운 것을 잃어버리고는 했다. 그러다가 한겨울이 되었고, 추위라면 남들보다 5도 정도는 버티기 힘든 몸이라, 한겨울엔 바깥을 나갈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몸이 무거워지겠다 싶어서, 동네 헬스장을 등록했다. 다른 것은 하지 않고 러닝만 30분 정도 뛰고 온다.
달릴 때는 숨이 막히도록 힘이 들고 그만 좀 멈출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지만, 그 순간을 참고 완주를 하면 몸 전체를 뒤 감는 만족감이 엄청나다. 예전엔 눈앞의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면서, 뒤쳐지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한 단거리 달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 페이스에 맞춰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천천히 오랫동안 뛰어도 된다는 것을 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퇴사 후의 뜀박질
퇴사하고 러닝을 하겠다고 하도 말하고 다녀서인지(나의 원죄다), 뛰기 무척 귀찮은 날이 와도 '그래도 뱉은 게 있는데 해야지'하면서 꾸준히 달렸다. 그래서 사람은 이루기 어려운 일을 소문내야 한다....하하
러닝은 지나치게 많은 자유로 인해 나 자신이 끝없이 흐트러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퀘스트 같다. 그리고 그 퀘스트는 30분 남짓이면 끝나고, 성취가 금세 눈에 보인다는 점이 좋다.
러닝을 하면서 쌓은 작은 성취들이 마음을 단단하게 해 준 것 같다. 뭔가를 내 의지에 의해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감각 자체가 주는 묘한 위안이 있다.
이제 봄이다. 러닝의 계절이 온다. 올봄에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보면서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