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형 퇴사자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가장 두뇌회전이 빠를 때는 새벽, 혹은 오전 시간대이고 하루가 점점 가면서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저녁을 먹고 나면 그냥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집중력이 거의 0으로 수렴한달까.
회사를 다닐 때나, 퇴사를 하고 나서나 저녁 시간을 활용해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노력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아 나는 원래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분명, 퇴사 후에는 절대적인 에너지 자체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타고난 기질 탓인 것 같다고. 삶을 이만큼이나 살아본 후에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저녁 시간은 그냥 농땡이를 편하게 치고 있다.
대신, 내가 가장 또랑또랑할 때는 언제인가? 생각해보면 단연 오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그 시간을 더 잘 쓰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아침 루틴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루틴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계기는 따로 있다.
몇 달 전부터 내 아침잠을 깨우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위층의 진동소리였다. 바닥에 핸드폰을 두는지, 새벽 5시만 되면 울리는 알람 때문에 한동안 스트레스가 막심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래, 이 윗집보다 일찍 일어나면 되지! 나 아침형 인간이잖아? 바꿀 수 없다면, 그냥 그것을 넘어버리는 것이다.
보통 아침 4~5시 사이에 눈을 뜨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전날 피치 못하게 늦게 자야 할 때는 빼고는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다. 거창한 일들을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글을 쫌 쫌 따리 쓰고, 경제뉴스를 팔로업하고 온갖 뉴스레터를 읽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후딱 간다. 아침을 먹고 운동을 가거나 하는데, 오전이 훌랑 지나있다.
아침형 인간의 아침
퇴사하고나서부터 아침을 잘 챙겨 먹고 있다. 예전엔 바나나 하나, 가끔은 요구르트를 먹는 게 전부였는데 이젠 베이글까지 추가했다. 베이글을 구워서 크림치즈나 잼 같은 것을 발라먹으면 확실히 든든하다. 어떤 베이글에, 어떤 것을 발라먹을지 고르는 것은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하는 선택이다. 매우 사소하지만, 이런 자그만 선택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
커피도 매일 내려마신다. 이제는 출근해서 내려먹었던 커피 머신이 없으므로, 직접 헤야 한다. 초등학생 입맛인 내가 유일하게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기도 하다. 카페인이 주는 힘은 여전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만큼 오후가 되면 좀 졸리다. 그래서 점심 먹고 낮잠을 잔다. 자체 시에스타다. 확실히 자고 나면 정신이 조금 맑아진다.
얼마 전 <별게 다 영감>이라는 책을 읽으며, '수급불류월' (水急不流月)이라는 명언을 알게 되었다. 물이 아무리 급이 흘러가도 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인데, 주변의 여건에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침의 일련의 루틴들은 나에게 '수급불류월'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에너지 같다. 살아 있다는 감각, 무의미하고 별것 아닌 일들로 보일지라도 조금씩 해나가며 느끼는 성취감 같은 것들이 파도 같은 불안에 휩쓸리지 않게 해주고 있다.
루틴을 만들어가는 시행착오들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내 기질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다고. 내가 게으른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하려고 한다.
너는 아침형 인간이다.
저녁 시간은 네 시간이 아니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