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투하듯 삽니다 - 28
결혼보다 일?!
엄마에게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면, 결혼을 할 거야?"
이 얘기는 즉슨, 결혼을 안 한다는 것은 나와 동생도 태어나지 않는다는 소리고, 그간 우리 가족의 이렇고 저런 30년이 넘는 역사가 사라진다는 소리인데. 나는 예의상 엄마가 에이, 그래도 해야지라고 대답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함)
아니 정말 안 하겠다는 소리야?! 이 반응은????
하여간 결국,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의 보람이 있고 어쩌고로 행복하게 마무리되었긴 했는데, 사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망설임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겠다는 그 사실이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가끔 이 얘기를 엄마에게 동생에게 친구들에게 종종 했다. (아니 어떻게 딸에게 그럴 수가 있냐면서... 나는 뒤끝이 있음)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일을 참 좋아했다.
3년 차였는지 4년 차였을지, 한참 매일 회사 다니는 게 힘들었을 때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회사 다니는 게 싫지 않냐고.
그랬더니 엄마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사실 수십 년, 그러니까 인생의 반 이상을 회사를 다녔으니까 그게 습관처럼 당연해졌을 수도 있고, 정년 퇴임 전에는 실무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보직을 맡았으니까 아무래도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런 마음이 덜한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정년 전해 안식년을 들어가기 전에도 실무에 열심히 임했고, 그 결과로 상도 받았다. 그렇다, 엄마는 정말 일을 사랑했던 거다. 그랬다면, 수십 년 전 방해(?)가 되는 결혼은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엄마의 결혼 투쟁
엄마는 80년대 초에 회사를 다니기 시작, 스물여덟의 나이인 87년도 12월에 결혼을 했다.
또래들의 엄마의 비해(특히 내가 첫째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가 적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 당시에 스무 살 후반이면 초혼으로는 많은 편이라고 했다. 나와 동생의 유년 시절 내내 엄마는 계속 일했던 직업인으로 남아 있고, 올해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고등학교는 이과를 나와 대학교는 영문과를 들어갔고 영어교사 자격증을 땄지만 교사가 되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범상치 않은 삶의 궤적을 그려온 엄마는, 사내 연애로 만난 아빠와의 결혼할 때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처음으로 가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투쟁의 길'을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엄청 간략한 버전으로 스무 살이 넘어서야 들을 수 있었고, 작년에 이르러서야 조금 자세한 버전을 알 수 있었는데, 이 에피소드를 듣자마자 느낀 건 참 엄마도 대단히 치열하고 절실한 '워커홀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보고 과거로 돌아가도 결혼을 할 거냐고 물어봤을 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정말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매우 보수적인 환경의 엄마네 회사에서는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한다. 여성 직원들 중에 그 누구도 기혼자는 없었고, 그 당시 엄마의 직업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선호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당연시되었을 것이다. 육군 사관학교 출신의 사장은 엄마에게 결혼을 할 거면,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고 그 후에 엄마의 윗 선배들도 “여자가 결혼하고 왜 회사를 다니려고 하냐” 며 헛소리를 지껄였다고 한다.
엄마는 사장을 설득하기 위해 비가 퍼붓는 날 관사로 찾아갔던 경험이 매우 치욕적이었다고 하는데, 사장의 부인이라는 사람이 했던 가부장적 옹호적 발언들(결혼하면 여자는 집에서 있어야 한다는) 얘기들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나마 친한 선배가 함께 가주어 다행이었다고도.
회사에서 허가가 나지 않자, 엄마는 파격 선언을 하는데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결혼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엄마에게 아빠가 이것을 동의했냐고 묻자 다 합의된 사항이었다고 한다) 일을 그만둬야 하는 것이면 그냥 결혼을 안 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서울 본사로까지 흘러들어 갔고 그 후로 여러 위의 말들이 오간 끝에 “인륜지대사를 막을 수 없다” 는 아주 유교적인 이유로 결혼하고 일을 다녀도 된다는 공식적인 ‘허가’가 내려왔고 12월로 날짜를 미뤄 무사히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의 상황이 서울부터 지방까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서울 본사의 선배들(아마 여성으로 추정)이 "일을 계속하게 해 줘라"라고 힘을 실어줬다고. 결국 여성들의 연대라니.
그 당시(87년) 민주항쟁 이후로 노동권에 대한 합의가 활발했는데,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등의 힘이 세진 것은 88년부터라고 한다. 엄마는 시기를 좀 앞서 나갔던 것이다.
만약 끝까지 회사에서 막았더라면, 엄마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아빠의 인내심이 적었더라면 아마 둘은 결혼하지 않고 나도 동생도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지금에야 육아휴직이 법으로 보장되고, (물론 수많은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일이지만) 일과 육아의 병행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지만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기까지는 개인의 외로운 싸움과 그를 지지하는 연대가 필연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투쟁의 역사를 거쳐 엄마는 이제 기성세대가 되었지만, 부당함과 싸운 그 용기에 엄지척을 해주고 싶다.
이 에피소드로 더 확실히 깨달은 것은 엄마가 얼마나 일에 진심이었는지다.
엄마도 회사에서 관리자 역할을 한 기성세대가 되었지만, 과거의 선택과 노력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엄마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고 좋아했는지에 대한 생각도. 그렇기에 결혼에 대한 질문에도 망설일 수 있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이젠 엄마에게 쫌생이같이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리고 싶은 일이 있었는지, 있는지, 있을 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