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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May 19. 2022

반쪽짜리 러너

장투하듯 삽니다 - 19

봄이 좋냐

얼마나 봄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왜냐, 뛰기에 완벽한 날씨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따뜻한 햇살과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트랙을 뛰다 보면, 온몸을 감싸는 만족감.

겨울 내내 답답한 러닝머신을 벗어날 그 봄을 기다렸는데,

다리를 다쳤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한 달 전쯤의 일이다. 신나는 마음으로 야외에서 뛰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던 날이었다. 왼쪽 무릎이 좀 삐그덕 거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평소대로 자전거도 탔고, 다음 날엔 야외에서 러닝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약속 가기 전에 러닝머신까지 뛰고 갔더랬다. 그때도 아픈 느낌이 있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냥 넘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며칠간 운동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러너 선배이자, 부상 경험자(?)이기도 한 동생은 얼른 병원에 가보라며 독촉했고 미루고 미루다 다음 주에 찾아간 병원에서 '무릎에 물이 찼다'는 진단을 받았다. 무리한 운동으로 생긴 결과물이라고 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하다간 낫지 않는다"며 혼을 냈다. 물리치료 선생님은 염증이 생긴 것이므로 한번 다치면, 다음에 또 재발할 수도 있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를 했는데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그럼 앞으로도 예전만큼 못 뛴단 얘기 아니여? (무슨 마라톤이라도 뛴 줄 알겠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마침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수십 년간 온갖 러닝을 섭렵했던 타고난 러너 무라카미 하루키 조차도 무릎 부상을 당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약한 아프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어느 부분에서 위화감 같은 것이 생겨서 힘을 줄 수 없게 된다.
무릎은 항상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부위다. 달리고 있으면 착지할 때마다 체중의 3배가 되는 충격이 발에 가해진다고 한다.
탁탁한 콘크리트 노면과 가공할 만한 하중의 증가 사이에서 무릎은 침묵을 지키며 참고 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무릎이라도 때로는 불평을 하고 싶을 것이다. 
코로 숨을 쉬는 것은 얼마든지 대체할 것이 있지만 무릎은 대체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리를 다치고 나서 깨달은 것은 두가지다.


항상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나서야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는 것. 러닝을 시작한 작년부터 지금까지 막 쓴 것이나 다름없는데 무릎이 잘 버텨준 것만으로 고맙다. 준비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완벽한 자세로 뛰지도 않았을 것이며, 끝나고 나서 스트레칭도 대충 하거나 넘겼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서 결국 이렇게 삐뽀삐뽀 알람을 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겸손해졌다는 것.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수많은 계단들이 이제는 좀 아찔하고, 횡단보도의 신호등까지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노약자들의 불편함을 정말 미미한 수준이겠지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무릎이 아팠던 엄마의 마음도 알 것 같고. 비장애인만을 고려해 설계한 공공 시설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이제서야. 


반쪽짜리 러너

하루키는 그럼에도 뛰고 뛰었다. (물론 그는 수십 년 동안 러닝을 해도 괜찮은 하늘이 내린 강철 몸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무릎이라는 것은 쓰면 쓸수록 닳는 소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계속 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릎에게 버텨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럼에도 뛰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달리기를 뛰어야 했기에, 뛰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으므로, 뛰는 것 자체가 존재의 증명이었으로, 살면서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일이 한계에 닥쳐 망연자실 해버리는 순간이 왔을 때, 누군가는 그저 외면을 하고 누군가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포기일 수도 있고, 계속해보자는 도전일 수도 있다. 무엇을 택하든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앞으로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올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선택한 것' 이므로 후회는 덜 하게 된다. 그런 것들을 반복하다 보면, 선택의 근육이 자라나서 단단한 확신이 생기지 않을까? 하루키가 확신을 가지고 달리기를 뛰었듯이.


지금 겪고 있는 무릎 부상은 그런 근육을 기르는 과정에서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하루키처럼 그럼에도 뛰어야한다는 확신을 갖고 싶다. 다시뛸 수 있게 된다면, 무릎을 잘 지키면서 더 나은 러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지금은 비록 반쪽짜리지만 말이다. 


물리치료 선생님은 부상 후에 운동을 시작할 때는 처음부터 많이 하려고 하면 안 되고, 적은 강도로 하면서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고 했다. 근육은 절대 한번에 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쉽게 이루려고 한다거나, 과한 욕심 부리지 않는 자세도 필요하다. 


세상엔 정말 키워야 하는 근육들이 많다. 언제까지 벌크업을 해야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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