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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끝이라 믿었던 것들 위에, 삶은 자라났다

조금씩 괜찮아지는 일은, 늘 조용히 시작되었다

by 온기

「열다섯 번째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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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밤은 벽지의 무늬를 따라가다 끝난다.

그건 대체로 울음을 삼킨 밤이다.


익숙한 시간의 흐름 속에 문득 튀어나오는 과거가 있다.

가령, 버스를 타고 가다 바깥 풍경을 보며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날.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떠올리는 오후.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지는 순간.

그럴 땐 늘 같은 말이 떠오른다.


“그땐 몰랐지.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걸.”




조용히 옆에 있었던 날의 다정함

스물둘, 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울고 있을 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


“아무 말도 안 해줘서 고마워.”

그 말은 내가 예상치 못한 문장으로,

긴 시간이 흐른 후 내게 돌아왔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때론 위로란 말을 골라 던지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때가 있다는 걸.




끝이라는 말을 삼킨 채, 붙잡고 있었던 마음

놓고 싶었다. 정말로.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게 무서웠고,

그 사람에게 미안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끝을 말하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잡고 있었다.

더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라도 버티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붙잡는다고 해서 머무는 건 아니라는 걸.

그 손을 놓아야, 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누군가 같은 자리에 서 있으면

조용히 속삭이게 된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스스로를 붙잡고 서 있던 새벽

죽고 싶다는 말을 마음속에 꼭 누르고

지하철 플랫폼 끝자락에 서 있었던 날.

사람들 틈에 섞여 개집표기를 통과하고,

자판기 앞에 멈춰 섰다.

커피를 하나 뽑아 들었지만,

딱히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손에 쥐고만 있었다.

그러다 입을 댄 순간, 울컥했다.


그날 이후,

별 의미 없어 보이던 순간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지하철 안 무표정한 얼굴들,

창문에 반사된 내 모습,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낡은 팝송.

그런 것들이 문득 마음에 걸렸다.


시간은 그렇게, 아주 천천히

무너진 마음 틈 사이로 스며들어

다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 지나서야 들리는 말들이 있다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나는 여전히 약하지만

어느새 이만큼 살아냈다.


돌아보면,

그토록 힘들었던 날들도

지금의 나를 만든 벽돌이 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지나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나고 나서야, 마음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늦었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누군가 이 말을 듣고 있다면,

꼭 전하고 싶다.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이만큼 살아낸 내가 말하니

조금은 믿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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