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은 자라지 않는다. 매일 햇빛을 쬐고 물을 주어도...
「스물네 번째 정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감각이 나를 누른다. 일어나야 하고, 지하철을 타야 하고, 인사를 해야 하고, 표정을 지어야 하고,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이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갉아먹는다. 하고 싶은 일은 먼 미래의 약속처럼 멀리 있고, 오늘이라는 무게는 늘 지금 여기에 있다.
내가 진짜 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끔 잊는다. 열여덟 살의 나는 무언가를 간절히 꿈꿨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냉장고 안 유통기한 지난 두유처럼, 꿈도 어느새 시들어 있다. 하고 싶은 일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돈과 책임과 가족과 사회가 한 목소리로 나를 끌어당긴다. '지금은 아니야.' '조금만 더 참아.' '안정이 먼저야.' 익숙한 말들이다.
회사 화장실 거울 앞에서, 나는 가끔 눈을 마주친다. 낯설고 피곤한 얼굴이 거기 있다.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문득 창밖 어둠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나를, 구하는 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퇴근길 문방구에서 우연히 발견한 연필 한 자루. 어릴 적 쓰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 그걸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음 한 귀퉁이가 따뜻해진다. 좋아하던 노래의 멜로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가 되살아난다. 창밖 가로등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볼 때, 이유 없이 울컥한다.
우리는 종종 하고 싶은 일을 유예하며 살아간다. 현실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작고 조용한 위로들이 스며든다. 그것들은 마치, 언 땅 아래서도 피어나는 들꽃처럼 고요하지만 단단하다.
언젠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겹쳐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오늘을 견딘 나에게 작게 웃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랑이니까. 나 자신을 향한 아주 조용한 사랑.
“괜찮아. 오늘도 잘했어.”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