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게 했던 관계를 지나, 나에게 도착한 후의 이야기
「스물다섯 번째 정오」
문득, 고요해졌다. 그 사람과의 마지막 통화가 끝난 뒤, 핸드폰을 내려놓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도 잦아들었고, 이유 없이 울컥 차오르던 눈물도 그쳤다. 마치 모든 감정이 방전된 후의 전등처럼,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이 고요함이야말로 진짜 나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마치 가랑비 같았다. 처음엔 젖는 줄도 몰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몸 안쪽까지 스며든 피로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말 한마디가 독처럼 퍼졌고, 침묵은 칼날처럼 나를 할퀴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은 척, 평온한 척, 사랑인 척하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 '그러면 나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 아닐까'라는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마주한 이 평온은 그런 죄책감조차도 조용히 잠재운다. '나를 지키는 일은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침묵이 가르쳐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일이 달라졌다. 누군가의 기분을 먼저 살피느라 잃어버렸던 내 표정을, 이제는 다시 찾고 있다. 커피를 내리는 소리, 창밖을 스치는 바람, 아무 의미 없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줄도 더 깊이 들린다. 나는 이 조용한 회복의 시간 속에서, 나를 다시 배우고 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요즘 너 얼굴이 편해 보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인지, 이제는 안다. 그건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되는 생의 방식이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매일이다.
혹시, 아직 그 안에 머물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말이 닿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떠나도 괜찮다고. 너는 지켜야 할 존재라고. 그리고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라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다정한지.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