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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걸어도 제자리였다

반복되는 하루 속, 지워지지 않는 무력감에 대하여

by 온기

「스물여섯 번째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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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오고, 또 아침이 온다. 똑같은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똑같은 컵에 물을 따르고, 똑같은 길로 출근한다. 차창 너머 풍경도 어제와 같고,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진 것이 없다.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들 사이에서, 나 혼자 정지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회사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컴퓨터를 켠다. 화면 속 숫자들과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내 안에선 조용한 파도가 친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처음엔 무서웠다. 내가 망가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그냥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점심시간이면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소소한 이야기들로 하루를 이어간다. 나도 웃는다. 그러나 웃는 내 얼굴이 나에게 낯설다. 거울을 보면, 하루를 견디는 법만 배운 얼굴이 있다. 살아가는 법은, 견디는 법과 같다고 믿게 된 지 오래다.


퇴근길.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은 유리창 너머 세상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다음 날이 온다. 반복되는 하루. 반복되는 무력감. 노력한다고 벗어날 수 없는 고요한 진창.


어느 날 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제자리인 이유는, 우리가 발이 아닌 마음으로 길을 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이 멈춰있으면, 아무리 발을 움직여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그 깨달음이 위로가 되진 않았다. 다만 이해가 되었다. 나는 망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아주 조용히, 아주 평범하게 지치고 있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친구에게 말했다. "가끔은, 하루를 다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 것 같아." 그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면 된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그게 전부야."


그 밤, 잠들기 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게 괜찮다고 말할 순 없어도, 모든 게 틀렸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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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내일도 눈을 뜨고 다시 걸어보는 것. 제자리일지라도, 그 걸음엔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는 믿음. 그거 하나면, 우리는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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