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하는 가장 작고 단단한 닻
큰 병원으로 둘째 딸 서하를 데리고 갔다. 아이의 자폐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시간 상담과 검사를 했다. 서하는 낯선 검사실에서도 제 할 일을 했고, 나는 밖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3주 후 의사 선생님에게서 검사 결과를 들었다.
발달 장애와 자폐 모두 가지고 있다고. 점수는 어느 정도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서하가 발달 장애가 있고, 자폐가 있다는 걸.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도 그 말을 직접 듣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알고 있는 것과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달랐나 보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들, 발달 장애, 자폐. 그 말들이 공기를 가르며 내 귀로 들어오는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이 확정된 사실이 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을 깬 건 뒷자리에 앉은 서하의 맑은 목소리였다. 창밖을 보던 아이는 내게 동요를 틀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이 방금 어떤 공간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그저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하고 즐거운 오후일 뿐이었다.
차 안 가득 경쾌하고 통통 튀는 동요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밝은 멜로디 위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억지로 꾹꾹 눌러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요가 흐르던 그 길 위에서, 나는 한참을 아파했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피자집에 갔다. 주문한 고르곤졸라 피자가 나오자 서하의 얼굴에 햇살 같은 웃음이 번졌다. 치즈가 듬뿍 얹어진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아이. 그 무구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아이에게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도, 병원에서 내려진 무거운 진단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하에게는 달콤한 피자를 한 입 베어 무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였다.
한때, 모든 것을 놓고 사라지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내가 지켜온 가치와 바름이 처참히 부정당하고, 사람은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부딪쳐 깨닫기까지의 과정. 그때는 삶이 너무 버거웠다.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냥 사라지면 편하겠다 싶었다.
이제 나는 이 아이를 내가 죽을 때까지 키워야 하는 미션이 생긴 것 같았다. 나름 살아갈 의무가 생긴 것이다. 나에게도 중요한 할 일이 생겼다. 서하를 키우는 것. 이 아이가 이 세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내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확실한, 내가 해야 할 일.
피자를 먹으며 서하가 웃을 때, 이 아이는 내가 보호해야 할 약한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준 존재라는 걸. 내가 흔들릴 때 나를 붙잡아주는 닻 같은 존재라는 걸. 사라지고 싶었던 내게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준 사람.
집에 돌아와 서하를 재웠다. 아이는 금세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이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괜찮다고. 우리 함께 가면 된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하의 속도로.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게 내게 생긴 이유다.
지켜주어야 할 연약한 존재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에 치여 모든 것을 놓고 싶었던 날,
거센 파도 속에서 나를 단단히 붙잡아준 삶의 닻은 바로 이 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