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주말 오후, (전) 남편이랑 한바탕 싸우고 나와서는 속으로 생각한다.
"진짜 그만하자! 더 이상 싸우고 맞추느라 이렇게 시간 낭비하기 싫어!!"
결혼 4년 차, 수차례의 이혼 고비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노력해 보자며 부부 상담까지 받고 있지만,
이미 마음에 울분이 많이 쌓인 탓인지 솟구치는 감정을 다스리는 게,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어 놓는 게 쉽지 않다.
그 길로 동네 카페에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심란한 마음을 달랜다.
글을 써 내려가며 생각도 정리하고, 책도 실컷 읽고 혼자 저녁까지 해결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집에 들어오니 남편은 안방 문을 닫고 있다. 분명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겠지.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남편이 깻잎을 사다 놨다.
아까 싸우기 전에 "저번에 사다 놓은 와사비 쌈무 남았으니까 깻잎만 사다가 고추장 불고기 해서 챱챱(둘만의 유행어) 같이 먹으면 맛있겠다!!"라고 꺄르르 웃으며 얘기했던 게 기억났다.
생각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그래서 먼저 사과하는 것에도 서툰 남편. 요리를 해서 무심하게 먹으라고 하는 게 남편의 유일한 화해법이었다.
(부부 상담을 받은 뒤로 먼저 와서 미안하다고도 할 줄 알게 됐지만..)
혹시나 내가 저녁시간 맞춰 들어오면 같이 먹으려고 생각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엊그제 해 먹고 남아서 얼려놓은 부추 볶음밥을 꺼내 먹은 흔적을 보니,
연락은 못하겠고, 기다리다 안 오니까 쓸쓸히 혼자 데워먹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냥 뭔가 마음이 안 좋다. 짠하다. 미안하다.
나와 같이 저녁을 해 먹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자기가 해준 음식을 내가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던 남편.
그 순간, 낮에 싸운 이유나 너무 밉고, 실망스럽고 이해할 수 없던 남편의 말이 뭐였는지 잊어버린다.
그냥 저벅저벅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 나도 화내서 미안하다고, 밥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하다고 꼭 안아주고 싶다.
우리의 부부싸움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이미 쌓여버린 안 좋은 감정들이 사소한 갈등으로 터져버리면 서로를 푹푹 찌르다가도 순간의 미안함과 연민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이 찌른 상처를 걱정한다.
서로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화해는 쉽지만 돌아보면 우린 늘 상처투성이였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처럼 화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깔깔 웃지만, 그 와중에도 아물지 않은 상처에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을 쏙 빼도 언제 그랬냐는 듯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면 좋을 텐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예전에 좋아했던 만화책에 "한 번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엔 시효 따위 없는 거라구."라는 대사가 있다.
크게 상처받은 기억이 없어서 당시엔 크게 와닿지도 않았던 저 대사가 왜 마음 깊숙이 박혀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꽤나 강력하게 직구로 던진 말이었으니 20년 전 읽은 만화책 대사가 아직까지도 생생한 걸 거다.
아픈 상처가 여럿 생겨보니, 상처받은 마음엔 시효가 없다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금세 없어지는 잔흠집 같은 상처도 있지만 큰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아마도 극복할 수 있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런 상처들이 한편으로 계속 이별을 준비하게 했던 거 같다.
남편을 생각하면 내가 잘못한 것들, 나에게 잘해준 것들, 좋았던 기억, 웃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로에게 낸 상처들 때문일 거다. 이 상처들은 나도 모르는 새 마음깊이 남아 상대의 행동에 적개심을 내비치고 분노를 일으킨다. 부부상담을 받으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대화법을 배우고, 관계를 이어 붙이려 해도 이런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방해를 해댄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마음 한쪽이 시큰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서, 화나서, 이성을 잃어서 한 행동이었다고 이미 난 상처가 없던 게 되는 건 아니다. 고작 기분 내키는 데로 뱉어지는 말 한마디 주제에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할 수도 있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다. 고의든 아니든 찌른 건 찌른 거고, 미안하다고 한들 칼을 뺀 자리에 마데카솔 광고의 상처처럼 바로 새살이 돋아나는 게 아니다.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관계일수록 말과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사랑하지만 가장 가깝다 보니 배우자에게 쉽게 짜증을 내기도,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상대방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임을, 나의 사소한 말과 작은 행동도 거대한 무기가 되어 큰 상처를 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다면, 그게 크든 작든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듬어줘야 한다.
"이 정도 사과하면 됐지! 뭘 더 어쩌라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건 최악이다. 그 '정도'는 상처받은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마음 아플만한 말이었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상처받은 사람 입에서 이제 아프지 않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마음을 어루만져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는 마음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덧나고 곪아 결혼생활 내내 부부관계를 망칠 기회를 엿볼지도 모른다.
같이 살다 보면 자연스레 부부싸움을 하게 되지만 화가 난다고 후회할 행동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진 말자. 싸우더라도 서로 존중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싸우자.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한번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잊혀지지 않는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