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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원 Jun 26. 2021

하동 일기 Prologue

나를 찾아가는 여행 에세이 1

흐린 날의 매암제다원              홍매화 한그루            

 처음에 하동을 가기로 했던 건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차의 산지로 기품이 흐르는 고즈넉한 분위기, 두 번째는 봄에만 얼굴을 내미는 매화꽃이었다.

숙소 섬진강플로렌스, 예쁜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자쿠지에서 아침 목욕을 하며 바라본 풍경

  프로방스풍의 아늑한 숙소에서 봄비를 기다리는 듯한 마른 덤불과 동그란 차나무를 바라본다. 오히려 흐린 듯한 날씨가 운치를 더해주고 드문드문 자리한 매화나무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하얗다.


  풍경 소리가 들리는 기와집 한 채, 저녁 무렵이면 굴뚝에 연기를 피워댈 장작이 한 켠에 수북이 쌓여있다. 멀리서 희미한 백의(白衣)를 입은 매화나무와 연둣빛 차나무, 회색빛의 구름까지 참으로 소박한 풍경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고매한 선비가 흰 버선을 신고 점잖게 차를 우려낼 것만 같다.

화개면 상덕길 위에서 바라본 풍경

  비탈길을 오르는 차바퀴가 헛돌아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녹차밭에서 불쑥 나타난 할아버지께서 나지막이 부르며 손짓을 하신다. 후진했다가 다시 올라가면 된단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길 초입까지 후진했다가 한번에 오르막 끝까지 밟았더니 무사통과했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소리쳐 불렀더니 일하다 말고 건너오신다.

  "정말 감사해요." 하고 초콜릿과 캐러멜을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처럼 웃으셨다. 그 미소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애플레몬티, 섬진강변

   달콤한 시나몬향이 가득한 카페 하동에서 애플레몬티를 마시며 평소 읽고 싶었던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읽는다. 프랑스 국민 동화작가인 클로드 퐁티는 어른들의 모순 때문에 현실의 권위와 논리가 자신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고 오히려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이 상상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이 희끗희끗한 백발의 작가는 "동심을 어떻게 유지하세요?"란 질문이 당황스럽다면서 동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년기나 성년기나 같은 사람이란다.

  우리 마음 속의 순수함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애써 어른스럽게 감추어왔던 건 아닐까. 다시 그것을 꺼내어 볼 용기가 있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까.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그림책 작가들의 아뜰리에와 인생, 창작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직접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https://me2.do/GFEP836R


해지는 오후의 섬진강변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의 찻자리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의 찻자리는 참 아늑했다. 찻자리는 다원의 안주인께서 이끌어주셨는데 차향기 못지않은 사람 향기가 났다. 차와 하동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시려는 따뜻한 진심이 느껴진다. 다양한 발효차를 소개해주시면서 매화꽃을 밖에서 따오셔서 찻잔에 넣어 주시며 차와 어우러지는 매화 향기를 느껴보라고 하신다. 직접 만드는 다과는 그때마다 달라지는데 구수한 곶감수정과와 달콤짭짤한 곶감치즈말이는 부드러운 맛의 발효차와 잘 어울렸다. 보름달이 산등성이 너머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호젓해진다. 차 뿐만 아니라 직접 만드신 리넨 소품들을 보니 손재주가 참 좋으시다.  남편분께서는 생태학자의 길을 걸으시면서 다원도 함께 운영하신다고 했다. 소박하지만 가슴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삶. 우리가 꿈꾸었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산수유 꽃, 매화꽃 조명, 달팽이 조명이 정겨운 다실

 

 찻자리 후 방으로 돌아가는 어둑어둑한 길을 손수 만드셨다는 두 개의 달팽이 조명이 밝혀준다. 마치 자신만의 삶의 등불을 밝히며 살아가는 사장님 내외분의 모습처럼.

 

아침 풍경

  다음날 아침, 사장님 말씀대로 뜨끈한 구들장에서 일어날 수가 없어 평소보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한번 누우면 일어날 수가 없는 마성의 구들장이다. 산수유꽃 너머로 보는 아침풍경이 선선하다. 알려주신대로 간식 바구니에 들어있는 누룽지에다 뜨거운 물을 부어 아침식사를 하니 속이 뜨끈해진다.

  떠나는 날 아침, 까만 아기고양이 후추가 마지막까지 새침하게 맴돌기에, 마음으로나마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에 올 땐, 친해지자. 후추야.

멋진 사장님이 커피를 내려주시는 카페 플래닛1020

  어쩌면 지난 봄, 플래닛 1020이란 카페에서 다음 여정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불확실성은 너무나 얽혀있어서 드러나지 않을 뿐, 이미 신이 주신 실타래가 베틀로 짜여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펜션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이 카페를 서울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다. 아메리카노 한모금, 쌉싸름한 초콜릿 한 조각에 짧았던 여행을 되돌아 본다. 나가기 전 들린 화장실 선반에서 박경리 유고시집을 발견했다. 들어본 이름이지만 자세히는 몰랐던 그의 시집을 촤라라락 넘기다 유독 시가 마음에 와서 꽂혔다.



일 잘하는 사내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거야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여행을 마친 지금에서야 뒤돌아보니 답은 이미 이 시 안에 있었다.


 내 작은 가슴에 차오르던 먹먹함.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지만 내 안에 남아 있었구나.

그것이 환상인지, 고독인지, 환상적 고독인지 나는 그 때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찾아 떠났나.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사 되돌아보니 그 자리에 있었구나. 인생이란 언제나 뒤늦게 알게 된다는 걸, 그 땐 몰랐다. 알았다면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것을. 모르기에 이렇게 찾아 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한(恨)의 미학'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세상에 치유받지 못한 부서진 마음들*을 어루만지듯, 박경리 선생님이 수줍은 아낙네같이 눈을 내리깐 저 은은한 보름달처럼 웃고 계실 것만 같다.



[노래] *Gilbert O'Sullivan - Alone Again  가사 중

It seems to me that

There are more hearts broken in the world

That can't be mended

Left unattended

What do we do

What do we do


아마도 이 세상엔 나 말고도

치유받지 못한 부서진 마음들이

보살핌 받지 못한 채 더 있을 거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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