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의 마지막 페이지
한 해 동안 쓴 뚱뚱한 다이어리의 마지막 페이지가 남았다.
매월 말이면 그 달에 있었던 일과 마음을 정리해 두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잊어버린 이름들과 순간들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쩌면 30대를 잘 보내줄 완만한 이별연습을
한 해 내내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가 엊그제 같다.
유난히 춥고 막막했던 계절은 그대로인데,
한 해 동안 특별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해의 목표는 회복과
30대에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는 것이었다.
다이어리 한 권이 다 채워졌지만
나는 아직도 여백이 가득한 것만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려놓거나 덜어내는 연습을 했다.
결혼이나 안정된 직장, 더 높은 연봉 같은 것들.
N포세대라는 말처럼 욕망을 포기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소망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다.
넓고 얕은 인간관계를 정리하며
지금의 나에게 유익하지 않은 만남을 구별했고,
사람들을 만난 뒤에는 내 소셜 배터리를 점검했다.
현실과 타협한 이직과 휴직과 퇴사를 모두 겪었고,
해낼 수 있을까 싶었던 수강 과정도 마쳤다.
나를 탐구하는 시간과 비로소 내게 맞는 운동도 찾았다.
좋다는 루틴이 보이면 펠리컨적 사고로 일단 시도했다. 오래가지 못한 게 많지만.
빈칸으로 남은 다이어리의 날들은 일에 파묻혀
감정을 글로 옮길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럴 때면 나를 돌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의 항암 과정으로 직장과 여러 일들이 멈췄지만
그 와중에도 하루하루는 살아내야 했다.
장녀로서, 나보다 엄마를 잘 돌볼 사람이 없다고 여길 만큼
나는 잘 참고 견뎠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며 체지방을 줄였고
냉장고와 옷장들도 비워내려 애썼다.
누구처럼 날씬해지지는 못했지만 앙상해질 리 없는 나를
이제는 인정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은 불행하기 십상이다.
특별할 줄 알았던 내 서른아홉의 끝이
이렇게 저무는 것 같아 서운해지려다가,
다이어리 맨 앞 ‘무탈한 한 해'를 쓴 문장을 다시 읽는다.
해낸 것도, 그 자체로 칭찬해 줄 일도 많지만
나는 여전히 나에게 야박하다.
빈칸처럼 서술하지 못한 순간들을 아쉬워한다.
그래도 내년에 쓸 새 다이어리 역시
그럭저럭 써 내려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한 해가 바뀌지만 고작 하루 차이.
삶이 계속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나의 마흔,
나의 새해에는
열심히 살지 말자. 너무 주저하지도 말자.
별 탈 없이, 사소하게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