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를 정주행 하며 여는 새해
20대 초반, 나보다 두 살 많은 사람이 내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너를 불쌍하게 보게 두지 마.”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보다 무작정 받아들였다.
인생의 선배가 던진 혜안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30대에 다시 만난 한 동생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 사람 참 불쌍한 인생’이라 말했다.
“그런 사람을 왜 불쌍하게 봐요?”
라며 단호하게 내게 되물었다.
불편한 동료와 교수를 매도하던 대학원생 동생의 논리는 내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열을 냈지만,
날 선 말들이 어쩐지 자신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나는 그 동생이 점점 불쌍해졌다.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던 중,
“불쌍하다”는 박동훈의 말에 살의가 느껴지게 분노하는 이지안을 본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순간,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믿고 따랐던 사람은 20대를 통틀어 가장 큰 생채기를 남기고 간 사람이 되었고,
날 선 말들로 나를 지치게 했던 사람은 30대에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누군가 나를 불쌍하게 본다면,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맞아, 나 좀 불쌍해.”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불쌍하고 내 삶도 가끔 애달프다.
그리고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렇다.
연민하는 것과 연민받는 것,
그 두 가지 모두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차가운 세상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짠하게 바라보는 일,
온기를 담은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
길을 가다 넘어진 사람을 보고 “으, 아프겠다” 하고 갈 길 가는 일.
작은 공감과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 보는 것은 누구보다 나에게 제일 좋은 일 같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세상을 버티게 하는 지성이고,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라고 믿는다.
사람이 어떻게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떻게 감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지독하게 엮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서 내가 쓰는 감정조차 아까운 사람도 있다.
‘지안’을 보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죄책감에 흠씬 두들겨 맞아도 괜찮다 생각하며 나 자신을 미워하고 끝내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공허한 일상 끝에서 마침내 스스로를 껴안고 처음 울어보는 ‘동훈’처럼,
연약하고 외로운 내가 불쌍해 눈물을 흘리던 날도 있었다.
삶은 자주 막막하다. 2026년이 시작됐지만 시간은 여전히 막연하게 흐르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는 불쌍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포장하거나 괜찮은 척하지 않고 싶다.
연민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감정도, 도망치는 핑계도 아니라
살아내느라 애쓴 나를 지켜주는 마지막 언어라 믿는다.
그래서 조금 덜 단단하고 조금 더 사람인 채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기를.
부디 불쌍히 여기소서. 폐허 같은 마음에서 구하소서.
편안함에 이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