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고 있어? 나는 아니긴 한데.

친구의 전시회와 결혼식, 그리고

by 쓰는제인
Layers, Ears, Steps (2025.12.5~2026.1.18)


고등학생이던 희봉이, 만자, 그리고 근자였던 나. 이렇게 셋은 스무 살이 되기 전-그러니까 서울에 놀러 가자며 만자의 이모집이 있는 광명에서 며칠 머물렀다. 그때 처음 서울을 구경하고 제부도에서 굴도 한 박스 쪄 먹고, 마지막 날에는 교촌치킨 레드 핫이 처음 출시되어 맥주와 함께 시켜 먹었다. 잘 자고 일어난 나와는 달리 만자와 희봉이는 새벽 내내 화장실을 오가며 괴로워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있었던 추억이다.


희봉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배운 적은 없어도 아기자기하게 곧잘 그려냈다. 나는 나에게는 없는 미감 같은 것, 곧 흉내내기 어려운 '솜씨'였다. 셋은 진학한 곳들이 전혀 달랐는데, 묘하게 잘 어울려 놀았다.

대학 졸업 즈음 경주 어느 자취방에서, 희봉이가 있다던 남해에서, 그리고 전시회가 열린 한남동에서 우리는 늘 5년 내 외로 한 번씩 만나지곤 했다. 먼저 연락하기보다는 잘 살고 있겠거니 하는 나와 달리, 늘 관심이 많은 만자 덕분이다. 이번 마흔이 되어 만난 우리도 그랬다. 몇 해를 거쳐 한번씩 만나는 강렬한 기억을 또 하나 만든 것이다.



일러스트 작가인 내 친구


남해에서 만났던 때, 소품들을 팔고 있던 김작가가 디자인한 병들을 사다가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팔았다. 딸기라테였는데, 당시에는 널리 알려진 일러스트 작가도 아니고 SNS로 홍보하지도 않았을 때라 그냥 시도만 좋았다. 3-4년 후, 할리스커피에서 김작가의 그림체가 있는 컵을 발견했다. 그리고 네이버 메인을 그린 것도 메인에 걸렸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표지 이후로도 교보문고에서 어쩐지 김작가가 그린 것 같은 표지를 들여다보면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친구의 소식을 찾아다니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잘 살고 있나보다 하며 반가워했다. 팬심은 아닌데, 일종의 따뜻한 무관심이라고 하면 적절하려나.



친구의 그림이 딱 내 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안하다. 만자는 너의 그림 좋다더라.) 나는 그녀가 가진 감각과, 그녀를 좋아하는 팬들이 있다는 것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하다. 어쩌면 기특한 것일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희봉이에 대한 기억이 또렷한 것은 우리가 자주 만나거나 일상을 나눌 만큼 가깝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만나기 전까지 설레는 친구. 얘는 그동안 뭐 하면서 살아왔을까, 사는 건 괜찮은지, 남편이랑은 잘 지내는지, 어디 손해 보고 다니는 건 아닌지 그런 오지랖들. 이상하게도 그녀가 나보다 형편이 훨씬 좋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소중한 바비인형 다루듯 했다.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작가로서 사는 건 꽤나 고달픈 일이었으리라. 모든 사정을 다 알지 못해도, 우리네가 겪는 어떤 일들을 희봉이도 겪었을 텐데 그 앤 어떻게 고민하고 견디어왔을까. 하는 질문은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렇지만 내가 건네는 말은 고작 "집은 자가니? 사는 건 요새 어떻니." 하는 세속적인 말을 툭 내뱉었다.

정말 웃겨.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던 사이는 어쩔 수 없는 걸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 중 하나였던


발걸음이라는 제목, 종이죽으로 만든 작품들.
핑크튤립이 걸어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나도 다 모르겠다의 상태에 이르렀다. 희봉이가 너는 요즘 어때?라는 물음에 나는 쉬고 있다고 답했다. 그런 답변을 하는 것이 나는 낯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연인인 나를 설명하기 어려워했기 때문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보고 유튜브 하라고 한다. 왜~ 나도 작가 하고 살고싶어~ 하고 되받아쳤지만, 나에게 적합한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모임 다섯 명 중의 네 번째 결혼식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본가로 내려갔다. 10년을 연애한 후 치르는 결혼식, 그 이전에의 행사는 친구의 모친상이 있었다. 오랜 시간 투병하셨던 어머니 자리가 빈자리일 줄 알았는데 아버님의 옆엔 고모님이 앉으셨다. 환하게 웃는 친구의 폰으로 나는 연신 결혼식의 꽃, 신부를 찍었다. 마치 고용된 사람처럼.



정말 축복스러운 일이다. 하필이면 남편 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성씨라 청첩장을 발견한 아빠가 계속 물었었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라 했다. 정말 무서운 도시다. 성씨가 같을 뿐인데, 집안의 자녀 성별과 어디쯤 사는지까지 알다니. 착하게 살아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본가에 와서 삭발하고 모든 치료를 끝낸 엄마를 만났다. 아무렇지 않게 엄마를 대했지만, 낯선 모습에 눈물이 고였다가 참았다. 결혼식을 보는데 엄마의 모습이 상기되었다. 나는 또 눈물이 고였다가 잘 참아냈다.



괜찮은 척을 일부러 하지 않고 살겠다 다짐하지만, 나는 꽤 밝은 연기를 잘하는 편이다.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게 이 날이 두 번째인 날인 것 같다. 처음은, 나보다 먼저 올린 내 동생의 결혼식에서다. 많고 많은 친척들에게 '너는 언제 하니'라는 말을 방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웃음과 너스레를 떨었는지 모른다. 다퉈서 한동안 보지 않았던 부모님을, 그래도 보필하기 위해 용기 낸 걸음이었다. 부모님과 화목한 사이인 척을 했던 그날도 내 기분 같은 건 사실 미뤄두었다.



솔직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나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친구들은 이미 결혼 10년 차가 넘었고, 육아 얘기에 장단 맞추기 위하여 나의 사랑하는 조카 얘기를 하는 것도 슬슬 힘들어지고 있다. 나는 조카를 위해 몰래 적금을 들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조카는 나의 아이가 아니며 다섯살 짜리의 가족 범주에 고모인 나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친구의 전시회에서 너는 어떤 의도로 브랜드를 만들고 어떤 과정에서 힘들었는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뭐였는지 등의 인터뷰 같은 질문은 하지 못했다. 만나기 전엔 여러 말들을 생각했는데 만나고나니 그저 희봉이가 반갑고 격려와 축하를 해주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내가 요즘 어떤지는 말할 수 없었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이제는 다섯 명의 계모임 인원 중 미혼은 나 하나다. 별 뜻 없이 '애가 없으면 이혼'이라거나 이미 잘들 살고 있으면서 연애감정을 다시 느끼기 위해 '이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친구들의 말들을 이제는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 이제 덜 보자,라고 밀어내곤 하지만 고맙게도 친구들은 친구비(나와 친구해주는 값)를 낸답시고 밥과 차를 사주며 나를 만난다. 내가 한 말은 농담처럼 넘겨질 것이다.




아빠는 내가 울산에 있는 내내 나에게 엄마를 돌보지 않는 책임전가를 하며 내 죄책감을 건드려댔다. 친구의 결혼식까지 운운하며 시집가지 않는 딸을 깎아내렸다. 나는 결혼식 이후부터 말이 급격히 줄었고 상경 후로도 일주일 간 사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글도 쓰지 못했다.


적당한 우울은 글쓰기의 재료가 되지만 지나친 우울은 그렇지 않다. 회복을 얘기하고 싶은 내 공간에서 슬픔과 우울에 잠식되는 글을 쓰기 싫었다. 또다시 가라앉는 나에 반해, 비교적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도 썩 잘 살고 있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달랐다. 나는 적어도 내가 이 순간 괜찮지 않다는 걸 인지한다.

잘 지내냐는 말에 피상적인 대답을 해도,

나는 안다. 잘 못 지내고 있다는 걸.



누구에게 증명하듯 살아가지 않고 오늘의 나를 좀 더 아는 채로 또 하루를 넘겨보려 한다.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잘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내 감정을 미루는 일 말고

삶을 포기하는 것을 미루고 미루는 쪽을 택한다.

막 살기로 다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또 살아내고 있는 나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언젠가, 친구가 한 말 처럼 사랑이 여기에 있다는 말도 믿어질 날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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