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회사의 망령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요즘이다. 빈칸이 되고 있는 2026 다이어리처럼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몸이 먼저 고장이 났고, 그 틈에 마음까지 휘청거리고 있다.
신체는 정신을 지배한다. 갑자기 면접을 보고 근무를 시작하게 된 곳에서 인수인계를 받아왔지만, 몸은 구역질을 했다. 쇠약해진 몸을 느꼈는데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새벽 4시 반부터 3시간을 괴로움에 고민하다 겨우 출근은 했지만 나는 계약진행을 하지 않기로 통보했다. 나는 일을 또 그만두게 되는 데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혹시 더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이번에도 도망친 건 아닐까. 퇴사가 반복될수록 선택은 점점 ‘결단’이 아니라 ‘자책’이 되었고, 그 자책은 나를 전진하게 하기보다는 자꾸 멈추게 했다.
친구는 ‘야, 때려치워’라는 말로 나를 세웠다. 퇴사를 종용하는 일이 이번만은 아니었다. 내 편에 서서 해주는 말이겠지만, 비교적 그 말을 많이 듣게 되는 상황들도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아 졌다. 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 하나쯤은 품고 다니고 모두가 만족스러워 다니는 회사가 어디 있겠냐 마는, 충분한 생각과 고민 끝에 내리는 퇴사가 반복되다 보면 자책과 절망이 스며온다. 이번에도 마치 총상을 입은 사람처럼 3일을 앓아누웠다.
사회적 기업에서 퇴사한 지 1년이 꼬박 지났다. 그곳에 남다른 의미와 애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회사의 이름이나 지난 동료들, 특히 나를 아껴줬지만 엄청난 상처로 남은 직장 상사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여러 번의 상담과 관련한 교수님과도 만나 위로도 받았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도하며 회개를 하고 회복도 구했다. 나를 붙잡는 동료에게 핑계처럼 했던, 언젠가 돌아가겠노라 말했던 내 말도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했고 좋은 이별을 하려 했던 선의가 배신감으로 느껴졌을 때, 마지막 귀갓길에 엉엉 울며 집에 오던 그 밤의 기억도 선명하다. 그래, 고생했던 시간들도 알겠고 회복하는 시간이 걸릴 만큼 사랑했던 것도 알겠다. 그런데 대체 나의 새로운 길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왜 자꾸 걸림돌처럼 느껴졌을까.
나는 마침내 그 회사와 관련한 것들에게서 화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좋은 추억으로 마무리하고 지긋지긋한 상처와도 안녕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사과하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다. 거기엔 내 열심도 묻어있고 나의 욕망, 기대, 보람, 나와 함께 성장한 사람들, 마음 고생하는 나를 다독이던 동료들이 있었다. 따뜻했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그곳에서의 일은 내게 단순히 직장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고 싶었던 자리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그곳의 소식과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에게서 듣는 이야기들 속 나를 챙겨주시던 상사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나는 불편했다. 퇴사한 회사에 대한 감정이 무감정해지기를 바랐지만 나는 얼른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단순히 회사에서 상처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믿고 맡겼던 가치가 나를 충분히 지켜주지 못했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며칠 전 그 상사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의 퇴사를 앞두고 정리하다 보니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노라고. 마지막에 고마움과 미안함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채 정리된 이별이 내내 마음이 걸렸다며 조심스럽게 내 안부를 물었다. 친구는 간단히 보내라고 미련 없는 옛 연인 대하듯 하라는 조언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묵혀왔던 마음들, 사과와 응원을 담아 적어 보냈고 나는 그제야 화해했다고 생각했다. 상사는 체기가 내려간 것 같다며 정말로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내 주변의 이들은 내게 말했다. 그 회사의 망령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이상했다. 나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온 화해와 회복 끝에 그 메시지로 한 시름 놓았다 싶었는데 가까운 이들에게서 듣는 말은 마치 ‘너 아직 아물지 않았어, 생각보다 네가 받은 상처가 컸나 보다.’ 하는 듯했다. 그 사이 두 곳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고 엄마의 병으로 케어하면서 나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여겼다. 내게 화해는 관계의 마찰을 정리한 것이었고, 회복은 내 안의 기준을 다시 세운 것이다. 어쩌면 이제야 마음을 정리했지만 기준이 아직 그 회사에 남아있는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보람’으로 일하는 사람이라 그래.
라는 말을 듣고 한참을 곱씹었다.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버티기 어렵고, 의미가 생기면 한계를 넘어 헌신하는 나. 그러다 구조가 나를 보호하지 못하면 나에게서 원인을 찾고 있었다. 조직은 시스템이 없었고, 나는 이미 일 이상의 것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구조에 놓이려 하면 트라우마처럼 공포감까지 느꼈다.
아직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보람만으로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회사를 떠났다, 이미 1년 전에. 그런데 그 조직을 너무 진지하게 통과했다. 후유증이 클 만큼 진심이었던 곳을 사랑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이 되지 않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나 또한 나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태워가지 않고 일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